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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우 Nov 23. 2020

길들여진다는 것 - 우리는 대단히 대단하지 않죠

자신이 얼마나 변했는지 돌아보세요

직선거리 800미터를 굳이 오토바이 택시를 잡아요. 날씨까지 쾌적해서 딱 걷기 좋은데 말이죠. 2층도 엘리베이터 타기, 해가 뜨겁다 싶으며 나갈 생각 말기, 언젠가는 나올 테니까, 식당에서 조급해하지 않기. 이 정도면 거의 태국 사람 아닌가요? 사람이 어떻게 안 변하나요? 사람 별로 대단하지 않아요. 인간이 얼마나 쉽고, 얕은 존재인가를 알려면 신병 훈련소만 가도 돼요. 명문대 다니는, 집안도 좋은 애가 배식으로 나온 돈가스를 더 먹겠다고 그걸 들고 냅다 뛰더라고요. 너무 어이가 없으니까, 간부들도 놔두던데요. 미치려면 제대로 미쳐야 덜 고생한다. 확실히 그 말은 일리가 있어요. 적어도 군대에서는요. 훈련소 앞 기수가 회식을 했는데, 과자가 남았나 봐요. 그걸 쓰레기 소각장에 숨겨두고, 우리 기수에게 귀띔해준 거예요. 어떻게 되긴요? 한 녀석이 쓰레기 더미 뒤지다가 간부에게 걸려서, 전원이 영하 십 도 알통 구보를 해야 했죠. 쿠크다스에 홈런볼 좀 먹겠다고, 귀한 집 아들이 쓰레기 더미를 뒤져요. 컵라면 짱박아 뒀다가 재래식 화장실에서 먹어요. 초코파이 봉지, 컵라면 컵이 똥통 안에 뒤엉켜 있어요. 관물대에 몰래 짱박아둔 초코파이를 몰래 꺼내다가 부스럭 소리가 났어요. 피곤에 절어서 자는 신병들이 스멀스멀 일어나요. 새벽 두 시 봉지 소리 때문에요. 뺏길까 봐, 한 입에 넣고 그 새벽에 오물오물 씹었던 기억이 생생해요.


요즘 제가 비싼 숙소에 맛 들였어요. 코로나 때문에 방콕 호텔 가격이 싸지기도 했고, 장기 여행자가 아니라서 가끔 잘 정도의 여력은 있거든요. 누군가의 코 고는 소리, 들락날락하는 소리, 가족과 통화하는 소리에 잠 설칠 일이 없죠. 제가 코를 골아서 누군가의 잠을 설치게 할 일도 없고요. 눈치 볼 필요 없이 혼자 자니 그렇게나 좋더라고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발코니에서 마시는 차 한잔은 좋은 방의 즐거움이죠. 목욕 가운 걸치고, 아름다운 전망을 보면서 아침 공기에 섞인 차향을 음미해요. 이거지, 이게 사는 재미지. 풍요로워져서는 새삼 돈의 위력을 실감해요. 돈은 이렇게나 좋은 거예요.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있어요. 도미토리에서 자는 가난뱅이들은 넘볼 수 없는 평화로움이죠.


하지만 전 알아요. 제가 가볍고, 얕은 인간이란 걸요. 장기 여행을 하면 도미토리에서 자야죠. 몇 달을 다니려면 매일매일 정해진 예산으로 아끼고, 쪼개면서 써야 하니까요. 하루 방 값 십만 원씩 쓰는 배낭 여행자가 얼마나 되겠어요? 배낭 여행자 모드가 되면, 도미토리에 개인용 차단막은 있는지, 공용 공간은 널찍한지를 보죠. 방이 조금 밝으면 좋겠고, 2층 침대 중 1층이 내 차지였으면 좋겠고, 베드 벅스만 없었으면 좋겠고, 같이 묵는 애들이 내 나이 좀 안 물어봤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5천 원, 만 원 방에서 자면 돈을 번 기분이 들어요. 방값 아꼈으니, 먹는 거라도 제대로 먹자. 스스로에게 주는 상으로 푸짐한 점심을 먹죠. 그런 기분이 또 즐거워요. 돈만 있는 것들이 이런 소소한 즐거움을 알기나 하겠어요?


우리는 알게 모르게 꾸물꾸물 변해 왔어요. 지금 스타벅스에서 커피 마신다고 흉보는 사람이 얼마나 되나요?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캐러멜 마키아토에 스콘을 그윽하게 드시는 나라가 한국 아닌가요? 컵라면 먹고, 스타벅스 가도 이제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생수가 처음 나왔을 때는 망할 거라고 확신했어요. 어디에나 공짜 수돗물이 있고, 보리차가 있는데 물을 사마시다뇨? 보리차나 옥수수차도 공짜인데 맹물을 돈 주고 사마셔요? 어떤 미친 사람이요? 그런데 요즘 수돗물 그냥 마시는 사람이 얼마나 되나요? 정수기라도 쓰죠. 생수가 원래부터 당연했던 것처럼 사마셔요. 예전엔 당연했던 수돗물이 지금은 불편하죠. 캔에 담긴 커피, 믹스 커피, 손 안의 인터넷, 배달 햄버거, 화상 통화가 아무렇지도 않죠? 대중들의 거부감도, 판단력도 완벽하지 않아요.


자신에 대한 확신이 먼 훗날 부끄러움이 될 수도 있어요. 주장하세요. 고집도 있어야죠.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라고 하죠. 고집은 변화를 읽는 능력과는 별개임도 아셔야 해요. 우리는 대기 오염조차 눈으로 확인할 수 없고, 식중독을 일으키는 음식을 혀로 감지해낼 능력도 없어요. 내가 생각하는 노란색과 타인이 생각하는 노란색은 미묘하게 모두 다르고, 내 혀끝의 맛조차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달라요. 조금만 몸 상태가 안 좋아져도 모든 음식이 쓰죠. 왜 이렇게 맛이 없어? 음식점을 비난했지만, 사실은 자신이 병들어서일 수도 있어요. 그 말씀을 드리려고, 굳이 이렇게 길게 이야기했어요. 내 생각도 세상의 질서에 길들여진, 혹은 오염된 결과물일 뿐이니까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존재는 진동이란 생각을 해요. 고정된 물체가 아니라, 흔들리는 빛이나 소리가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하고요.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불안하고, 변덕이 심할 리가 없으니까요. 찰랑대는 상태일 뿐이죠. 그렇게 생각하면 되려 마음이 편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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