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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우 Nov 29. 2020

80년대 우리는 왜 그렇게 가난했을까요?

쌀과 연탄이 떨어질까 봐 무서웠던 시절

지금도 어려운 사람 참 많죠. 결식아동도 많고요. 80년대에는 가난이 참 흔했어요.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의 사람들을 만나면 일단 체취가 심할 거예요. 가난의 냄새죠. 섬유 유연제도 안 쓰죠. 치실 같은 건 구경조차 해본 적 없죠. 매일 샤워요? 여름엔 등목이라도 하죠. 겨울에 누가 매일 샤워를 해요? 뜨거운 물은 그냥 나오나요? 석유곤로나 연탄아궁이에 세숫대야 물 팔팔 끓여야 겨우 머리 감는 물 나오는데요. 나프탈렌이 재래식 화장실이며, 옷장에 가득했어요. 나프탈렌 냄새가 사람에게서 참 진하게 배어 나왔죠.  


그냥 노는 집은 없었어요.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하니까요. 종일 온 가족이 몇백 원 버는 노동에 달라붙어요. 가장 흔했던 건 봉투 붙이기. 봉투는 한쪽만 구멍이 뚫려 있어야 하잖아요. 한쪽은 막혀 있어야죠. 한쪽을 풀로 붙여서 막는 일이었죠. 제일 흔하고, 제일 돈 안 되는 부업이었죠. 인형 눈알 붙이기도 많이 했어요. 눈동자가 없는 인형을 잔뜩 받아와서, 눈동자를 붙여주는 거죠. 접착제로요. 우리 집은 마늘 까기도 했어요. 마늘을 잔뜩 까서, 삼양라면에 납품하는 일이었어요. 그걸 갈아서 라면 프를 만드는 거죠. 신발 밑창 오리기도 있었네요. 점선대로 오려서, 신발 안에 쏙 들어가게 만드는 거요. 수를 놓는 것도 있었는데, 그건 우리 같은 꼬맹이는 도울 수가 없었어요. 어머니가 선을 따라서, 색색깔의 실로 채워 넣는 고난도 작업이었죠. 어느 집이나 다 난장판이었어요. 방바닥이 티끌 없이 깨끗한 집은 좀 사는 집인 거죠. 돈도 안 되는데 부피는 또 얼마나 큰지 몰라요. 일감을 받아와서, 다시 갖다 주는 것도 일이죠. 어마어마한 크기의 짐을 가져다주고, 받아오는 돈은 고작 천 원, 이천 원이었죠. 천 원이 안 될 때도 있고요. 그때 제가 일요일마다 백 원을 받았는데, 그 돈이 얼마나 크게 느껴졌겠어요? 50원에 떡볶이 떡 스무 개를 먹을 수 있었던 시절이었죠.


지금의 전세와는 전혀 다른 전세였어요. 집주인과 동거를 해요. 지금은 아파트가 대세지만, 그때는 단독주택이 더 많았죠. 누가 봐도 더 좋은 안채가 있고, 누가 봐도 후진 별채가 있어요. 그 별채 단칸방에서 주인 눈치 보면서 사는 거예요. 우리처럼 아들만 둘이면, 전세를 잘 안 받아 줘요. 집이 더러워지고, 시끄럽다고요. 아이가 하나라고 거짓말하고, 이사 끝내고 배 째라고 하는 집도 많았어요. 국민학교 2학년 때 주인집 아주머니가 명동 코스모스 백화점(당시엔 아주 잘 나가는 백화점이었죠)에서 옷장사를 하셨어요. 저는 그때 코코아라는 걸 처음 먹어 봤어요. 코코아도 타 주시는 정 많은 분이었지만, 큰 아들이 무서웠어요. 우리가 마당에서 팽이라도 돌리면 우당탕 방문을 열고 나와서 우리를 째려보는 거예요. 독기를 가득 품고 째려만 보는데, 찍소리도 못하고 나가서 놀아야 했죠. 직업이 만화가였거든요. 탈고하고 초판 인쇄된 만화책을 보라고 줬는데, 너무 재밌는 거예요. 아버지 원수를 갚으려고 권법을 연마하는 소년 이야기였는데, 안대를 하고 젓가락으로 파리를 잡는 장면에 정말 반했다니까요. 다리미 같은 게 전기를 많이 잡아먹어요. 계량기 눈금이 확확 돌아가면, 지금 뭐 하는 거냐며 주인집에서 달려와요. 전깃세, 수도세를 대충 나눠서 내다보니까 많이 쓴다 싶으면 태클이 들어오는 거죠. 그때 내 집 장만의 욕망은 지금보다 크면 컸지, 적지는 않았어요. 전세의 설움은, 시집살이 뺨쳤죠.


양말만 구멍이 나는 게 아니에요. 무릎, 팔꿈치에 구멍이 난 옷도 그렇게 많았어요. 솜씨 좋은 어머니들이 거기에 동그란 천을 덧대서 꿰매 주고는 했죠. 그러면 또 그게 멋있어 보이기도 했어요. 신발 바닥에도 구멍이 잘 뚫렸죠. 지금처럼 끈 묶는 신발도 한참 후에나 나왔어요. 기차표 동양고무에서 나오는 끈 없는 신발이 대세였죠. 고무신은 적어도 서울 아이들은 안 신었어요. 지금의 단화 스타일이 가장 흔한 신발이었죠. 활동량이 워낙 많다 보니, 바닥에 구멍이 잘 뚫려요. 밑창이 잘 닳기도 해서, 정말 잘 미끄러졌어요. 그런 신발을 신다가 타이거, 월드컵, 까발로, 페가수스 같은 끈 달린 신발이 나온 거예요. 한 마디로 신세계였죠. 월드컵은 쌔니타이즈드 공법으로, 향기 나는 밑창을 개발했어요. 이런 천지개벽할 일이 있나요? 결국 꽃향기 나는 쌔니타이즈드 밑창은, 아이들의 발냄새와 범벅이 되면서 더 역겨워지기는 했지만요. 타이거에서 처음 출시한 이중 안전 매듭도 그렇게 멋질 수가 없었는데 말이죠. 나이키와 프로 스펙스가 등장하면서, 어찌나 다들 그렇게 추레해 보이던지요.  


지금처럼 달걀이 흔해 빠진 반찬이 아니었어요. 제 소원이 혼자 달걀 두 알 먹는 거였으니까요. 달걀만 귀했겠어요? 환타나 콜라는 소풍 때나 마실 수 있는 음료였죠. 친구 집에 갔더니 냉장고에 콜라, 사이다가 가득한 거예요. 이런 집도 세상에 있구나. 어마어마한 빈부 격차를 냉장고 콜라로 느꼈다니까요. 못 먹어서 얼굴에 버짐이 그렇게들 많이 피었어요. 가난한 집 아이들은 콧물 자국, 땟국물 자국, 버짐 삼단 콤보에 머릿니까지 얹으면 화룡정점이었죠. 외모에서 빈부의 차가 확연히 날 수밖에 없었어요. 오죽하면 우량아 선발대회가 있었겠어요? 머리 크고, 볼 늘어진 아기가 가장 아름다운 아기였죠. 삐쩍 곯은 아기들이 얼마나 많았으면요. 대신 갈치는 엄청 흔하고 쌌어요. 지금처럼 대접받는 생선이 아니었죠. 가격까지는 정확히 기억 안 나지만 5백 원에 봉지 가득 담아줬을 거예요. 그 귀한 갈치를요. 형이 노력상이란 걸 받아 왔는데, 우리 집안 최초의 상이었어요. 흥분한 아버지가 바나나를 사 오셨는데, 전 그때의 바나나 향을 지금도 잊지 못해요. 세상엔 이런 달콤함도 있구나. 설탕에서 나오는 핵직구 달달함이 아니라, 천국에서 갓 출시된 은은하고, 기품 있는 향이 방안에 확 퍼지더라고요. 바나나는 몇 년에 한 번 먹을까 말까였어요. 제가 상 탈 때는 안 사주시더라고요. 지금의 바나나에서는 왜 그 향이 안 나는지 모르겠어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더 줄어드는 나이가 되어가고 있어요. 벌써 이만큼이나 살았어요. 마지막 날도 눈 깜짝할 사이에 올 거예요. 사이사이 글을 쓸 수 있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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