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던져진 질문을 묻어 버리지 말라던 마왕

아무튼 신해철

by 모노


이상하게도 수능을 생각하면 중 3 때가 떠오른다. 당시 경기도는 연합고사라는 고등학교 입학 시험이 있었다. 내가 다닌 중학교에서는 인문계에 갈 학생들을 모아 두고 야간 자율 학습 같은 것을 시켰다. 밤늦도록 붙잡아둔 건 아니라서 야자라고 할 수 있나 모르겠지만, 어쨌든 야자가 끝나면 나와 친구 1, 2, 3은 학교 건물 뒤 정자에 모였다. 라일락 나무가 듬성듬성 심어진 곳이었다. 몇 그루 되지 않는 나무에서는 좋은 향기가 났다. 우리는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음악을 듣고 여러 가지 결의도 했다. 나중에 어떤 어떤 어른이 되자.. 뭐 그런.


어떤 어른은 커녕 고등학교라는 세계도 상상하지 못하던 애송이 1, 2, 3, 4는 신해철을 좋아했다. 아, 애송이 4는 곽부성을 더 좋아했지만. 그 녀석 덕분에 나는 중국어의 지읒자도 모르지만 곽부성 노래의 어떤 멜로디를 아직도 기억한다. 녀석 역시 중국어를 몰랐으므로 들리는 대로 한글로 끄적여 따라 불렀다. 곽부성은 내 눈엔 너무 진하게 생긴 사람이라 싫다고 말했었다. 누가 봐도 진하게 생긴 남자와 결혼한 지금의 나는 좀 웃기다.


정자에서 우리는 넥스트의 날아라 병아리를 자주 들었다. 나는 '육교 위의 네모난 상자 속에서 처음 나와 만난 노란 병아리 얄리는..'이라는 마왕의 내레이션이 시작되면 뭔가 '지르르'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저음은 뭐지.. 이런 게 진정한 남자의 목소리 아닐까.. 그랬다. 중 3의 내게 남자라는 존재는 개념이 흐릿했다. 흐릿한 개념 속에서도 남녀공학 교실의 뛰어다니는 남자아이들은 애송이로 보였다. 마왕의 저음은 뭔가 개념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좋은 것도, 싫은 것도 같고, 유혹적인 것도 같았다.


날아라 병아리가 있는 앨범에서 가장 좋아했던 곡은 the dreamer였다. 나는 이 곡이 인생 곡이라고 생각했다. 왜 자꾸 웃음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혼자 진지한 중딩의 나를 떠올리는데 너무 귀엽다. 내가 나를 이렇게 귀여워해도 되나?



그녀의 고운 눈물도 내 마음을 잡지 못했지
열병에 걸린 어린애처럼 꿈을 꾸며 나의 눈길은
먼 곳만을 향했기에
..
난 아직 내게 던져진 질문들을
일상의 피곤 속에 묻어 버릴 수는 없어
언젠가 지쳐 쓰러질 것을 알아도
꿈은 또 날아가네 절망의 껍질을 깨고
넥스트 - the dreamer (1994)



낭만을 노래한 게 아닌 이 노래를 제목만 보고 좋아한 것도 같다. 나는 꿈속에 사는 중딩이었다. 친구 1, 2, 3도 마찬가지. 우리는 허무맹랑하고 추상적인 꿈들을 나눴다. 괴로울 것 같은 고딩의 세계는 상상하기 싫었다.



아침엔 우유 한잔 점심엔 FAST FOOD
쫓기는 사람처럼 시곗바늘 보면서 거리를
가득 메운 자동차 경적소리
어깨를 늘어뜨린 학생들
THIS IS THE CITY LIFE
넥스트 - 도시인 (1992)



시간이 흘러 도시인 가사 같이 사는 어른이 되었는데도 마왕의 가사는 내게 힘이 있다. 꿈속에 사는 사춘기 중딩이라 좋아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마왕은 내 많은 처음을 함께 했다. 그 시절 사전에 없던 netizen이라는 단어를 부여잡고 무슨 뜻일까 고민하게 만들었고, 초딩 중딩 고딩 직딩이라는 언어를 라디오 속 마왕의 목소리로 처음 들었다. 행복하기 위해 사는 거라고 알려줬고, 내게 던져진 질문들을 일상의 피곤 속에 묻어두지 말라고 처음 말해준 어른이었다. 무엇보다 나와 맞는 것을 찾았을 때 내 안에서 울리는 주파수 - 지르르함을 알게 해 주었다.


오늘도 아침 들풀처럼 일어나 방탄소년단의 '잠시'와 'stay'를 들으며 마음이 지르르했던 나는, 1994년의 중딩과, 자정의 독서실 차 안에서 신해철의 음악도시를 듣던 고딩과, 이제 여기 없는 마왕과, 대단히 살아 숨 쉬는 방탄소년단의 연결고리를 생각해 보았다. 같은 세계에 없는 그 모두가 친구 같다. 좋은 사람은 좋은 것을 남기고, 그 힘으로 남은 외로움들이 살아간다. 들풀로 살아가더라도 오늘은 좀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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