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연애 2

미래에서 기다릴게

by 모노

미래에서 기다릴게 2

“털이 많아서 좋은 점이 뭐야?” 선배의 손등에서 팔꿈치까지 난 털을 쓸며 내가 물었다.
“생각 안 해봤는데”
“그럼 나쁜 점은?”
“너 같은 애가 징그럽다고 하는 거?” 뒤끝 있긴. 내가 신입 사원 때 한 얘기를 기억하고 있다.
“정확히 기억을 하셔야죠. 선배한테 징그럽다고 한 게 아니라 여자들이 징그럽다고 하지 않냐고 물어본 거지. 난 지적인 남자가 좋은데 털이 많으면 육(肉)적인 느낌이라”
“육적인 건 또 뭐야?”
“이런 거?” 나는 장난스럽게 선배의 팔을 다시 쓸었다.
“아 완벽히 알겠네” 선배는 웃었다. 내 도발을 모를 리 없는데 선배는 더이상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회사에서 만나 청평사에 가기까지 2년 동안 우린 친한 친구였다. 어울리는 무리에 다른 선배들도 있었지만 선배만 편했다. 선배는 신기하게도 일 얘기로 시작해서 내 밑바닥에 있는 감정까지 털어놓게 만들었다. 어떻게 2년간이나 그랬는지 모르겠다. 각자 만나는 사람이 있어서 방심했구나 정도면 이해가 될까.


내게는 관계를 끝내지 못하는 병이 있었다. 마음이 떠났어도 헤어지자는 말을 못 했다. 간신히 말을 꺼내도 상대가 납득하지 못하면 질질 끌려 다녔다. 선배는 나의 이런 면을 알고 있었다. 청평사에 다녀온 뒤 선배는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고 했다. 나는 못 그랬다. 선배는 얼마간 기다려줬다. 그러다 우물쭈물하는 나를 견디지 못하고 내 세계에서 완전히 나가 버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선배가 나가고 아팠다. 아침에 도저히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병원에서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기억하는 한 나는 항상 우울했기 때문에 별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진단을 받으니 낫고 싶어 열심히 약을 챙겨 먹었다. 마주 보고 앉아 눈도 마주치지 않는 선배에게 인사하며 출근하고, 남자 친구가 만나자면 만나는 일상을 계속했다. 내 안에 뭔가 중요한 것이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여전히 시작할 힘도 끝낼 힘도 나질 않았다. 나는 그저 시간을 견뎠고 아무에게도 속내를 내비치지 않았다.


그 사이 선배 밑으로 신입이 들어왔다. 나보다 한 살 어린 그녀는 밝고 예뻤다. 질문하는 후배의 목소리와 대답하는 선배의 목소리가 파티션을 넘어왔다. 나는 의사가 권했던 상담 치료를 시작해야 했다. 후배가 내게 말을 걸면 수술한 티가 나는 쌍꺼풀만 쳐다봤다. 후배가 앞서 걸어갈 때면 살짝 알이 나온 종아리를 유심히 봤다. 소용없었다. 후배는 예뻤고 종아리 라인은 완벽했다. 후배는 내게 선물을 주고 굳이 ‘언니’라고 부르며 다가왔다. “언니 어제 집에 갔는데 일본어 학습지 신청한 게 온 거예요. 아빠가 ‘김지민 어린이 구몬 선생님 왔다’ 그러면서 갖다 줬어요”라며 아빠가 아직도 자기를 아기 취급한다고 말했다. 선배 밑으로 들어온 게 아니었대도 후배는 내 사랑을 받을 수 없었다. 나는 친절하게 대하며 미워했다. 그렇게 밖에 못하는 내가 싫었다. 후배에게 매일 지는 기분이었다.


반 년여 동안 천천히 나았다. 남자 친구와는 몇 번의 실패 끝에 헤어졌다. 혼자가 되고 나서 선배의 마음을 헤아렸다. 남자 친구와 헤어지지도 못하면서 제 것처럼 팔을 쓰다듬었던 내가 얼마나 미웠을까. 내가 선배와 후배를 엮는 망상으로 힘들 때 선배는 내게 걸려오는 현실의 내 남자 친구 때문에 힘들었겠지. 나는 행동하지 않는 것으로 선택했나. 선배를 충분히 좋아하지 않았나. 상황을 바꿀 힘은 여전히 나지 않았다. 우리는 곧 다른 부서 다른 빌딩으로 흩어졌다. 선배는 끝까지 나와 말을 섞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회사로 이직했다.


올 초, 아빠는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장례식을 마치고 출근하니 잊고 있던 김지민 후배에게 메시지가 왔다. 사내에 회람된 부고를 보고 온 모양이다. 1층으로 내려가니 후배가 서 있다. 여전히 예쁜 후배 얼굴 너머로 회색이던 2007년 내 얼굴이 떠오른다. 후배는 눈이 빨개져서 울며 나를 안았다. 생각지 못한 위로가 전해졌다.


‘미래에서 기다릴게’라는 무책임한 말을 남기고 떠난 것은 나였다. 선배와 같이 본 영화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 깔리던 ‘카와라나이 모노(변하지 않는 것)’는 변함없이 지질한 나를 위한 노래였다. 김지민 후배는 존재만으로 내 생각이 맞음을 알려준다. 12년 만에 그녀에게 또 진 기분이다. 후배가 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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