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마감을 지키지 못했다.

K는 항공권, J는 사직서, i는 구독을 취소했다

by 모두쌤

1. 작가


아무래도 안 되겠어.


K는 속으로 생각했다.

잠시 후 밤 12시가 넘으면 마감시간을 넘기게 된다. 글은 아직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아니, 계속 쓰기는 했는데 문장이 되지 못하고, 글이 되지 못했다. 영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계속 글의 주제가 바뀐다. 닭도 계란을 진득하니 한 달은 품어야(실제로는 20 일즈음인가?) 병아리가 나온다고 했다. 그런데 "나"라는 닭은 마치 알을 품고 있다가 새로운 알이 눈에 보이면 품었던 알을 내팽개치고 새로운 알을 품었다가 또 새로운 알이 눈에 띄면 또 새로운 알을 품고 있다. 그러니 병아리가 나올 일이 없다. 글이 문장이 되지 못하고 글이 되지 않았다.


여행이나 갈까?



K는 인터넷으로 항공권을 찾아본다.

이미 마감 시한은 지났고 내일 아침부터 휴대폰에 불이 나겠지 하며 한숨도 잠깐 쉬어본다.



뭐, 인생 그렇지.



전업작가.

딱히 내세울만한 유명 작품은 없었지만, 나름 신춘문예 등단 작가라는 타이틀로 지금껏 잘 살아왔다. 시간강사로 대학에서 소설 강의도 잠깐 했고, 각종 문화센나 출판사 기획 강의나 이벤트 강사로 여기저기 불려 다녔다. 몇몇 출판사와 매년 출간 계약을 맺고 정기적으로 출판도 하며 기성 작가로서의 입지를 다지고 있었다. 그런데, 요즘 정말로 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무슨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그렇다. 앞으로 나가지를 못했다. K는 메일을 썼다.


편집장님
제가 개인적인 이유로 더 이상 글을 쓰기 어렵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드리겠습니다.
저와 관련된 계약은 귀책사유가 제게 있으니
향후 발생될 어떤 불이익도 감수하겠습니다.
당분간은 연락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2024.12.28.
작가 K


전송.

K는 마우스로 메일 전송을 완료했다.

거의 동시에 항공권 구매도 완료했다. 편도 항공권. 이제는 떠난다. 다시 돌아 올진 모르겠지만. 암튼, 지금 이 시간과 이 공간과는 잠시 이별이다. 주변사람들에 대한, 독자에 대한 신뢰를 저버린 자에 대한 비난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지. K는 휴대폰을 껐다. 침대로와 눈을 감았다.




2. 편집장



이게 뭐지?



J는 출근해서 밤사이 도착한 메일들을 살폈다. 언제부턴가 거의 모든 원고들은 메일로 받고 있어 아침에 출근하면 가장 먼저 메일부터 확인했다. 그런데 오늘은 제목 없는 메일이 눈에 띄었다. 그것도 발신인이 K작가. 분명히 어제까지 원고를 넘겨주겠다고 했던 작가. 나름 유명세도 있지만 대체 불가 작가는 아니었다. 혹시라도 일이 잘못되면 언제든 비슷한 레벨의 작가는 많았다. 다만, J가 다니는 J 출판사의 신춘문예 당선자고 비교적 요구조건이나 페이 조건이 까다롭지 않았고, 독자층도 넓은 편이라 협업하기에 용이했다. 그래서 J도 나름 선호했던 작가였다. 그런데, 이렇게 원고 투고가 아닌 제목 없는 메일을 보내는 일은 거의 없는, 아니 처음 있는 일이었다.


... 개인적인 이유로...



J는 자기도 모르게 메일을 따라 읽었다.



개인적인 이유라...

연락이 어렵다...



J는 살짝 화가 났다. 그동안 나름 최선을 다해 신경을 써줬는데 그 대가가 고작 이건가 싶었다. 최근 몇 년 동안 출판계의 불황에도 불구하고 J출판사 기획회의(대표님과 함께하는!)에서 늘 K를 옹호하는 역할을 했던 J였기 때문이었다.



최소한 전화 한 번은 해줘야 하는 것 아니야?



J는 여전히 화가 났다.

어제까지 들어와야 하는 원고 때문이기도 했고, 대체 원고 섭외 때문이기도 했고, K작가와의 계약사항 재확인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받지도 않을 전화를 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고, 답도 없을 문자를 보내야 하고, 메일에 대한 답장도 보내야 했다. 무엇보다 이 상황에 대하여 대표님이 출근하면 바로 보고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J는 서랍 속에 있는 사직서를 한번 바라봤다.


오늘인가?




3. 독자.



어? 작가가 K가 아니네?


i는 고개를 갸웃했다. 매주 정기적으로 K의 글을 인터넷에서 발간되는 메거진에서 읽던 i였다. K의 글을 읽고 나서는 학교에서 돌아온 초등학교 고학년 딸아이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K의 글은 일상생활과 관련된 수필이나 간단한 주제의 단편 소설이라 가볍게 읽기에 좋았다. 매주 1편씩 부담 없이 읽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K의 글이 아니었다. 작가 X. 이력을 보니 K의 이력과 비슷해 보였다. 신춘문예 등단, 여러 권의 저서. 하지만 K는 아니었다. 메거진 하단에 작가의 개인적 사정에 의하여 작가가 바뀌었다는 설명이 눈에 들어왔다. 개인적 사정이라...



지아에게 뭐라고 하지?



i는 순간 딸아이 생각이 났다.

잠시 후 학교에서 돌아오면 이런 상황에 대한 설명도 해야 하는데 하는 생각에 살짝 화가 났다. 왜 이런 일이 생겨서 성가시게 하나 하는 생각에 출판사에 항의 전화라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다. 그것도 귀찮다. 그냥 출판사 홈페이지에 글이나 남기는 게 낫다고 생각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평소 J메거진을 즐겨 읽는 독자입니다. 오늘자 메거진에 K작가의 글이 아닌 X작가의 글이 올라왔습니다. 평소 K작가의 글을 독자로서 매우 난감하였습니다. 물로 작가의 개인적인 사정이라고는 하나 독자와의 신뢰에 문제가 발생한 것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향후 대책에 대한 자세한 안내를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24.12.28.
독자 i




4. 그날 오후



K의 휴대폰은 종일 꺼져 있었음.

K는 편도 출국했음.


J는 대체 작가 X를 섭외함.

J는 대표에게 사직서를 제출함.

J출판사 대표는 대체 편집장에 Y를 섭외함.


i는 딸 지아에게 K작가 글 대신 X작가의 글을 읽어줌.

i는 J출판사 메거진 구독을 취소함.

K는 편도 항공으로,
J는 사직서로,
i는 구독 취소로 자신들의 마감을 지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