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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두쌤 Nov 30. 2024

지하철 안을 둘러보았다

그런 남자를 또 볼 수 있을까?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꼭 이렇다니까!

그럴 수도 있지. 괜찮아.

웃기네, 뭐가 괜찮아? 웃음거리만 되었잖아!

아냐. 그렇지 않아!


"그만. 그만!"

순간, 지하철 안의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몇몇 사람들의 시선과 마주치고는 고개를 숙여 연신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친구와 만나기로 한 역까지는 아직 멀었기에 중간에 지하철에서 내릴 수도 없었다. 또 이렇게 오늘도 우스운 사람이 되어 버렸다.


언제부턴가 내 머릿속, 아니 마음속, 아니 정신 속, 아니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전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두 개의 어떤 존재가 느껴진다. 늘 대립하고, 싸우고, 헐뜯고, 타협하지 않는 존재. 하루하루 일상의 삶 속에서 늘 다투고 있다. 그러다 문득 못 참겠다 싶으면 진짜 내가 짠하고 등장하고는 오늘처럼 소리를 질러 상황을 강제 종료하기도 하고.


왼쪽이야.

아냐, 오른쪽이야.

왼쪽이라니까!

오른쪽이라니까!



이제는 지하철을 내려야 하는데 어느 쪽 문이 열릴 것이지 갖고 싸운다. 이게 싸울 일인가 싶은데 내 안의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두 존재는 기어코 또 싸우고야 만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 역은 선릉, 선릉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 왼쪽입니다.


아주 명쾌한 안내 방송을 들으며 왼쪽 출입문으로 향했다. 이번에 승패가 너무 명확해서인지 내 안의 두 녀석은 아무 반응이 없다. 그렇지, 하며 왼쪽 출입문에 섰다. 순간, 출입문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보다 내 뒤로 한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였다. 그리고 하얀 얼굴에 오뚝한 코와 진한 눈썹과 커다란 두 눈, 그리고 이마를 살짝 가린 긴 앞머리와 짙은 회색 코트와 검은색 바지를 입고 있는 모습. 순간 그 남자의 눈빛과 마주쳤다.

흠칫 놀라 잠깐 마주쳤던 시선을 돌렸다.


뭘 봐?

마음에 들지?

아니. 뭔 소리야?

오래간만에 심장이 뛰는데?

정말 뛰는데?

뭔 소리야!


또, 또 시작이다.

내 안의 두 녀석이 또 다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 내 진짜 마음까지 세 개의 마음이 섞여버렸다. 정말 보기 드물게 두 녀석은 같은 편이 되었다는 걸 느꼈다. 다만 지금은 그런 사실은 안중에도 없고 내 뒤의 남자에만 온통 신경이 쓰였다. 잠깐 마주쳤던 시선을 거두는 것이 너무 아쉬울 뿐이었다.



처음이었다.

지금껏 살아가면서 규칙이나 정해진 틀에서 벗어난 적이 거의 없었다. 오죽하면 대학시절 그 흔한 MT 한번 가지 않았다.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 그것도 남녀가 유별한데 함께 같은 공간에서 잠을 잔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 아빠도 엄마도 같은 생각이었다. 나도 그런 생각에서 벗어날 특별한 이유도 없었고 벗어나고 싶지도 않았다. 물론 내가 전공했던 학과에 선배나 동기 중에 괜찮은 남자가 하나 없었다는 것도 한몫하기도 했지만. 그런 내가 지금 내 뒤에 서있는 누군지도 모르는 한 남자에 설레고 있는 것이다.


출입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맨 앞에 있는 나를 따라 내렸다. 나는 차마 뒤를 돌아볼 수가 없어 걷는 속도를 늦췄다. 뒤에 있던 그 남자는  속도를 잠깐 늦추는가 싶더니 바로 몇 걸음 나를 앞질러 걸어갔다. 그래. 당연하겠지.


따라갈까?

넌, 자존심도 없니?

그게 밥이라도 먹여준다니?

그럼 어디 한번 따라가 봐. 또 웃음거리나 되게!

그냥 궁금해서 가보는 거야.


그런데.

나도 모르게 내 발걸음이 그 남자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이미 역에서의 친구와의 약속은 저만치 잊어버렸다. 나도 모르게 그 남자 바로 뒤로 붙어서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뒤에서 보니 더욱 그 남자를 잘 볼 수 있었다. 큰 키에 뭔가 따뜻해 보이는 느낌의 남자. 스컬레이터에서 나와 밖으로 걸어간다. 방금 전까지는 바로 뒤를 따라가도 이상하지 않은 전철이었지만, 지금은 누가 봐도 뒤를 따라가는 것이 이상해 보이는 밖이다. 어쩌지?


뭘 어째? 그냥 따라가!

아냐. 이제 그만해. 남들 눈도 있고...

이제 와서 그만하면 이게 뭐야?

뭐긴. 그냥 해프닝이지.

일단 더 따라가. 여기서 돌아서면 후회할걸?


따라갔다.

여기서 멈추면 밤에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살짝 머뭇거리는 사이 그 남자는 어느덧 저만치 앞서 있다. 오히려 잘됐다. 눈치도 덜 볼 수도 있고. 선릉역에서 벗어난 남자는 인근 교보문고로 향했다. 실은 나도 친구와 만날 장소가 교보문고라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친구도  만나고 미지의 남자도 따라가고...



그 남자는 교보문고로 바로 들어가 버렸다. 나도 따라서 들어갔다. 친구와의 약속시간이 거의 다 되었고 조금 있으면  친구인 K에게 문자나 전화가 올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순간 내겐 이 남자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그 남자는 성큼성큼 베스트셀러를 진열해 놓은 데스크 쪽으로 가서 이런저런 책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나도 슬쩍 그 근처에서 서성거렸다.


세아야! 벌써 왔어?

어? 어....

왜 왔으면 전화를 하지!

어? 하려던 참이었어...


친구 K였다.

원래 만나기로 한 장소는 이쪽은 아니었는데 K도 시간이 좀 남아서 베스트셀러를 좀 구경 왔다고 했다. 그런데, 이게 지금은 전혀 반갑지 않았다. 당연히!


우리 지금 뭐 먹으러 갈까?

어...?

내가 아까 봐 둔 식당이 있어. 거기로 가자!

어...


순식간에 내게 팔짱을 낀 K에게 이끌려 발걸음을 돌렸다. 뭐라고 하지? 핑계를 대야 하는데... 도무지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이대로 이 남자를 놓쳐야 하나...


잠깐만! 어, 지석? 너 지석이 아니야?


K가 베스트셀러를 살펴보던, 내가 계속 쫓아온 그 남자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 아닌가! 세상에, 이런 일이!


어? K? 너 K 맞지?

와! 완전 오래간만이다. 잘 지냈어?

나야 잘 지냈지! 너도?

나도 잘 지냈어!


신났군. 나는 속으로, 머리로, 이게 어떤 상황인지 이해하려고 모든 감각을 풀가동했다.


와! 드라마로군!

그러게. 누가 보면 짰다고 하겠어.

대박일세.

동감일세.


내 안의 두 녀석도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둘은 또 의견의 일치를 다. 오늘 벌써 두 번째 의견의 일치. 이러다 둘이 합쳐지는 것은 아닌지.


참, 여기는 내 친구 세아야. 인사해.

안녕하세요? 저는 지석이라고 합니다.

네, 저는 세아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난 정말 반가웠다. 이름이 지석이라고? 이름도 멋지네. 무조건 반가웠다. 아까부터 쭉. 그리고 지금은 더 반갑고!


그런데 혹시 아까 전철에서...

네?


이렇게 훅 들어오다니. 분명 내가 전철에서 소리 지른 것도 기억할 것이다. 뭐, 어쩌겠어.


뭐야? 둘이 알아? 지석아, 우리 지금 뭐 좀 먹으러 갈 건데  같이 갈래?

아, 아니야. 약속이 있어서. 다음에.

그래? 그럼 그러지 뭐.


뜻밖에 이름까지 알았기에 나의 발걸음은 더욱더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초면에 같이 가자고 할 수도 없고. 질질 끌리듯 교보문고를 나왔다. K는 인근 식당으로 날 밀어 넣었고  우린 자리에 앉았다. 


둘이 전철에서 봤어?

아니. 우연히 그냥...

그래?

그런데 누구야, 이름이 지석이라고?

응, 너무 괜찮지? 고등학교 때 친구.

고등학교? 그럼 지금은 뭐 하는데?

대학원 다닌다고 들었어. 곧 유학 간다고...

아, 유학...

벌써 결혼도 했어. 진작에.

아, 그래?


충격.

아직 서른도 안된 이렇게 멋진 남자가 벌써 결혼을 했다니. 그보다 어쩌면 난 남자 운도 이렇게 없는지. MT 한번 가지 않던 내가 정말이지 모처럼 나도 모르게 따라갈 정도로  맘에 드는 남자를 찾았는데!


K는 그밖에 다른 이야기도 한참을 했고, 나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지석이라는 그 남자의 하얀 얼굴만 기억에 남아있을 뿐. 지석...


그래도 회는 없지?

없긴. 아쉽지. 너무 아쉽지.

 어쩌겠어? 이런 게 인생이지.

또 괜찮은 사람 있겠지. 세상은 넓어.

그래도 그 남자는 없겠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 속의 두 녀석들이 또 다툰다.

그냥 지켜본다. 오늘은 뭔가 너무 아쉽다. 어차피 나와는 상관없는 남자. 하지만, 한순간 나도 모르게 따라갈 정도로, 친구와의 약속도 다 무시할 정도로 날 몰입하게 했던 남자였기에. 정말 우연히 이름까지도 알게 되었는데. 그런 사람이 또 있겠지. 있을까?


지하철 안을 살펴본다. 또 소리를 질러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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