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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두쌤 Nov 23. 2024

리조트의 곰은 피곤하다.

'이건 아니지. 이미 교체 시기가 너무 지났는데...'

                                         안내문

이번 저희 리조트의 물난리로 인해 객실 및 부대시설 사용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침수와 관련된 객실 및 로비 등 각종 시설에 대한 점검은 모두 마쳤습니다. 일부 미비한 부분들도 조속히 개선하여 리뉴얼 예정이니 널리 양해 부탁드립니다.

늘 고객님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는 리조트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4.8.15.

                        A리조트 대표 및 직원 일동



1. 리조트 곰 29의 입장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벌써 11월이 중순으로 가고 있는데 말이다. 아무리 이번 여름이 더워서 힘이 들었다고 해도 인형류 교체 시기가 10월을 넘긴 적은 없었다. 지금껏 아무 이야기도 없는 것을 보면 분명 인형류 본부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리조트 곰 29호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직이야?

응.

힘들지 않아?

그렇지 뭐.

우린 오늘까지만 있다 갈 거야. 나중에 볼 수 있으면 봐!

그래. 수고했어. 잘 가!


여름 내내 같이 로비에 있던 조각류 기린 1, 2와 인사를 나눴다. 조각류라 나와 같은 인형류와는 다소 생각이나 성향은 달랐지만, 그래도 말이 좀 통하는 친구들이었다. 막상 내일부터는 못 본다고 생각하니 살짝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물론 다른 겨울용 조각류들이 또 오긴 하겠지만.


위잉! 위잉! 위잉!

진공청소기 소리가 들렸다.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


위잉! 아직도 아무 연락 없어요?

아, 그러네요.

위잉! 요즘 인형류 일손이 좀 달리나 보네요.

글쎄요.

위잉! 너무 신경 쓰지 마요. 곧 가겠죠!

네, 고맙습니다.


청소여사 손에 이끌려 로비 카펫을 청소하며 지나가던 로비 진공청소기 R5가 말을 걸어왔다. 인형류도 이니고 조각류도 아닌 전자류인데도 아는척하며 말을 걸어주는 R5가 고맙다. 그냥 모른 척 지나가도 되는데 궃이 걱정해 주는 모습이 이 리조트 로비에서 가장 오래된 경력자이자 연장자의 모습으로 느껴졌다. 나 같은 인형류는 너무 먼지를 많이 만들어 낸다고 늘 불안을 이야기했던 복도용 진공청소기 R2와는 영 딴판이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먼지가 어디 인형류만의 잘못인가! 순간 살짝 열이 올랐다.


어머! 인형이다!

곰인형이네!

어머, 정말 크다!

빨리 사진 좀 찍어 줘!


가을을 맞아 리조트에 놀러 온 방문객들이다. 대부분이 아가씨들이고 나 같은 대형 곰인형에 당연히 열광을 하곤 했다. 순간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고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이 놈의 인기라니!


어, 그런데 좀 먼지가 있네!

정말! 인형 색깔도 좀 바랬네.

그런데 왜 이쪽에 있지? 안쪽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음, 인형이 좀 피곤해 보이기도 해.

래도 일단 찍어! 어서!


그렇게 방문객들은 사진을 찍고 야외로 나가버렸다. 덩그러니 남은 리조트 곰 29는 화가 났다. 이게 뭔가 싶었다. 때에 맞게 다른 인형류가 왔었다면 이런 말은 들을 필요가 없었을 텐데 말이다. 인형류에게 가장 듣기 싫은 말이 '먼지', '색이 바랬다'와 같이 인형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말이었다. 그걸 오늘 동시에 다 들었으니!


아무래도 인형류 본부에 연락을 해야겠어.


리조트 곰 29는 공중에 메시지를 띄웠다. 사실, 인형류나 조각류 등 계절성 장식품류는 본부에 먼저 연락을 하는 것이 절대 권장되지는 않는다. 특히 리조트에 배치되는 경우는 더더욱 그랬다. 나름 일반 가정집이나 작은 상점에 배치되는 것보다는 훨씬 안전하고 줗은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서로 리조트 배치를 희망하기 때문에 혹시라도 본부에서 조금이라도 성가시게 느낄 수 있는 행동은 하지 않는 것이 좋으므로.


삐리릭! 삐리릭!

본부. 리조트 곰 29. 교체시기 확인 요망!

본부. 리조트 곰 29. 교체시기 확인 요망!

송신 끝?

삐리릭! 삐리릭!


보통의 경우라면 바로 회신이 온다고 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아니 신호를 보내고 받는데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실은 리조트 곰 29도 이렇게 먼저 본부로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처음이라, 실은 이게 맞는 것인지 아닌지도 몰랐다.


삐리릭! 삐리릭!

여기는 본부. 리조트 곰 29는 이미 교체되었음.

여기는 본부. 리조트 곰 29는 이미 교체되었음.

송신 끝!

삐리릭! 삐리릭!


어라? 이게 뭔가? 그럼 나는 왜 여기에 있지?

뭔가 잘못됐어!



리조트 곰 29는 순간 란에 싸인다. 내가 여기에 있는데, 교체가 되었다니?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왜?




2. 조각류 기린의 입장


결국 마지막 날까지 함께 있게 되네.

그러게. 참 안 됐어.


조각류인 기린 1과 기린 2는 리조트 곰 29와의 잠깐의 대화를 마치고 슬쩍 눈빛을 교환했다. 불쌍한 인형류. 지난여름 내내 함께 고생을 했다 중간에 갑작스러운 물난리로 인해 로비 중앙에서 물이 넘쳤던 문가로 옮겨졌다 지금은 대형 폐기물 분리수거일만 기다리는 리조트 곰 29 아니 이제는 대체 곰 29 말이다. 아직도 자신이 정상적인 인형류 리조트 곰 29로 믿고 있는 듯 보였다.


남의 일 같지가 않아.

그래. 우리도 저런 처지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

암튼 조심하자고. 깨지지 않게.

맞아. 그래야지.



조각류 기린 1과 기린 2는 마저 이야기를 나눴다. 다행히 두 조각류 모두 큰 이상이 없어 내일부터는 보관 창고로 들어가기로 조각류 본부에서 결정 통보가 왔다. 이제 겨울 몇 달 동안 푹 쉬는 일만 남았다.


내년 여름엔 다시 복귀하고...

올해도 그럭저럭 잘 보냈네.


길린 조각 둘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자리를 정리했다.




3. 전기류 진공청소기 R5의 입장


위잉! 위잉! 위잉!

정말 별일을 다 보네. 내가 너무 오래 있었나 봐.


진공청소기 R5는 청소여사의 능숙한 손길로 벽에 걸린 충전기에 꽂혔다. 아무 생각 없이 충전되는 순간 아까 그 대체 곰 29가 떠올랐다.


아직도 자기가 리조트의 곰인 줄 착각을 하다니. 어지간히 충격이 심했나 봐. 곧 분리수거되면 더욱 충격이 클 텐데...


진공청소기 R5는 생각할수록 대체 곰 29가 걱정이 되었다. 실은 리조트의 각종 인형류, 조각류 그리고 자신 같은 전기류 들이 대체되는 것을 많이 봐왔다. R5는 이 리조트가 생기고 거의 가장 처음에 구비된 전기류라 리조트 안에서 모르는 물건류들이 없다. 다행히 아직까지 충전과 흡입력에 문제가 없어 잘 버티고 있는 중이기도 하고.


그래. 그때 조각류 고양이 23도 그랬지.

그때 단체로 놀러 온 학생들의 한심스러운 장난만 아니었어도...


문득 너무 귀여웠던 장식류 고양이 23이 떠올랐다. 2년 전이었나, 처음 리조트 로비중앙에 배치되었을 때 너무나 귀여운 모습에 모든 인형류와 조각류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던 장식류 고양이 23. 하지만, 리조트로 배치 한 달쯤 지났을까 인근 대학에서 리조트로 단체로 온 남녀 대학생들 틈에서 이리저리 사진 찍기 아이템으로 옮겨 다니다 그만 대리석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생각하면 너무나 끔찍했던 경험이었다. 리조트 안의 모든 진공청소기들이 당연히 바로 출동하여 현장을 정리했었다. 그때 마주쳤던 고양이 23의 한 맺힌 눈빛을 아마도 평생 잊기는 어려울 것이다. 깨진 장식류는 무조건 소각 폐기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런데 지금 물에 젖어 폐기 대기하고 있는 대체 곰 29의 일까지 또 경험하다니...  



위잉! 나도 참 그러네.

위잉! 내 팔자도 참...


진공청소기 R5는 괜히 전원을 on으로 작동해 본다. 아직 완충까지는 멀었지만 기분전환으로...




4. 인형류 본부의 입장


어라? 또 교체 확인 메시지가 왔네?


인형류 본부에서 수신을 담당하고 있는 N7은 짜증이 났다. 그렇지 않아도 가뜩이나 지구 온난화로 인해 특히 한국의 가을이 짧아 대체 인형류 수급 주기가 매년 바뀌고 있어 신경이 쓰이는 중이었다. 게다가 요즘은 며칠도 기다리지 못하고 리조트나 호텔에 배치된 복에 겨운 인형류들까지 문의 메시지를 우기도 하니 말이다.



이건 본부장님에게 건의 좀 해야겠어.

대체된 인형류들에겐 메시지 송신권을 박탈하자고. 쓸데없이 내일모레 분리수거될 폐기 예정 인형류들의 메시지까지 일일이  받는 건 좀 그래.



어느덧 N7은 본부에서 메시지 수신담당으로 일한 지도 이제 20년이 되어간다. 뭐 우리 인형류에게 시간은 그다지 의미는 없지만 그래도 나름 긴 시간을 보내다 보니 이제는 다양한 인형류의 대체 상황이 그저 처리해야 하는 업무로만 보인다. 가끔은 리조트 곰 29, 아니 대체 곰 29의 경우처럼 같은 인형류로서 안타깝고, 배려해주고 싶은 경우도 있다. 하지만, 요즘은 워낙에 리조트나 호텔을 찾는 사람들의 수준이 올라가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약간이라도 하자가 발생하면 바로 대체하거나 분리수거할 수 밖에는 없다.


하긴, 그래야 또 새로운 인형류도 탄생하는 것이고...




 5. 분리수거 팀장의 입장



곧 갑니다. 이번주 토요일에.

아. 그렇군요. 그렇게 알겠습니다.



간신히 대형 폐기물 담당 트럭이 수배가 되었다. 몇 달 전부터 가평에 있는  A리조트에서 지난여름 물난리로 인해 정말 침수되었던 대형 인형류 곰을 정리해 달라는 요청이 왔었다. 해당 인형류의 사이즈가 워낙에 커서 차량 수배가 쉽지 않았다. 암튼, 이제야 마무리가 될 것 같다. 수거된 곰인형은 상태를 봐서 재활용하던지, 전면 해체하던지 할 것이다. 만약 완전 폐기가 된다면 소각해야 할 것이다.




6. 손님들의 입장



민원 1 : 왠지 곰의 모습이 다소 피곤해 보입니다. 어깨도 좀 움츠려 있어 보이고, 고개도 숙인 것이 어떻게 보면 영락없이 나의 모습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아마 내가 지쳐있으니 리조트의 곰까지 지쳐 보이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듭니다만.


민원 2 : 곰인형이 색도 바래고, 먼지도 많이 있네요. 위생상 좀 그렇네요.


민원 3 : 흉물스럽네요. 리조트에서 신경 좀 쓰세요.




7. 리조트의 입장


"숙박을 목적으로 하는 호텔과는 달리 여가를 중점에 두기 때문에 주로 도심 생활권과는 떨어진 바다 근처나 산 근처와 같은 자연 속에 건설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이유로 교통편이 좋지 않기 때문에 주로 자가용을 이용하거나 셔틀버스로 오게 된다.(출처:나무위키)"



리조트의 곰은 피곤하다. 

물난리에 그렇게 쉽게 젖어버리다니.

새로 온 인형류 곰 30은 방수기능도 있다고 하니...

                            리조트 리뉴얼 안내문

먼저 우리 A리조트를 찾아주시는 모든 고객님들들께 늘 감사드립니다.

지난여름 물난리로 인하여 침수되었던 본 리조트의 마스코트와 같던 대형 곰인형이 이번주부터 더욱 귀엽고 새로운 곰인형으로 업그레이드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더욱 더 많은 성원 바라며,
우리 고객님들께 항상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A리조트가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4.11.23.

                        A리조트 대표 및 직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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