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자'로 산다는 것

헛소리 모으기 24. 정체성을 바라보다

by 모두다


철학은 우리에게 정체성이라는 축복과 저주를 동시에 내려주었다.


jakob-owens-Kjrg4UkRpOM-unsplash.jpg Copyright 2020. Jakob Owens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대답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 중 가장 보편적인 것을 고르라면 이름, 나이, 국적, 성별, 직업, 취미 등을 나열하는 방법일 것이다.

보편적이지만 아쉽게도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정보는 피상적인 수준에 불과하다. 나는 이러한 정보들이 알려주는 것은 그저 ‘나는 어떤 일상을 사는가?’의 정도라고 생각한다.

스스로와 타자가 생각하는 나 자신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선 우린 정체성을 내세우기도 한다. “저는 ○○주의자입니다.”라는 간단한 문장을 통해서도 우리는 막대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

정체성이라는 존재는 우리에게 언어의 경제성과 자아확립, 유대감 형성이라는 이점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반대로 편견과 획일화, 배타적 태도라는 부정적인 결과 역시도 야기한 존재이다. 이런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정체성이지만, 이 정체성만큼 보편적이고 편리한 개념도 없기에, 우리는 이를 애용한다.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해선 조금 시간을 되돌려 과거로 가봐야 한다.

아직 사회구조가 기초적인 수준에 불과했을 고대 시대의 인간들이 지녔을 정체성은 무엇이 있을까? 아마 부족 정체성이 가장 기본적인 것이라 생각된다.

당시의 사회는 부족이라는 집단을 기본으로 구성된 만큼, 자신이 어떤 부족에 속하고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가 그 사람의 정체를 나타내는 요소였다. 물론 이 정체성에 거부감을 느낀 개인도 있기야 했겠다만, 그런 자들은 사회에서 배척당하기 십상인 환경이었으니 대부분의 사람은 부족 정체성을 지니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sourav-bhaduri-GJHkmOfaPX8-unsplash.jpg Copyright 2021. Sourav Bhaduri

그후 사회가 발전하며 국가라는 것이 만들어진 이후에는 그 정체성도 확장되었다.

세금을 내고 노역을 수행하는 것이 필수가 된 만큼 사회구성원들에게 있어 국가 정체성은 필수적인 덕목이 되었다. 그와 동시에 자신이 나고 자란 가문, 세분화와 전문화를 거친 직업, 자신과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민족 등 다른 정체성들도 확립되기 시작한 시기이다.

학문과 교육이 발전하면서부턴 우리는 형이상학적인 것에도 정체성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 현실의 내가 직접 보고 듣지 못하는 무언가에 대해서도 우리는 나름의 해석과 사고로 접근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우주의 중심은 무엇인지, 현실세계와 다른 이상적인 세계가 존재하는지, 인간은 누가 만들었는지, 이 세상은 무엇으로 구성되었는지 등 말이다.

인간은 이런 형이상학적 사고에 기반해 철학과 종교를 만들었고, 자신이 믿는 사고관을 ‘○○주의’, ‘○○이론’이라고 명명하는 습관을 길들이기도 했다. 스스로에게도 ‘○○주의자’라는 호칭을 자랑스럽게 내걸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이다.

형이상학적 사고에 대한 습관은 자신이 몸담은 사회체계로까지도 이어졌다. 현재의 사회체계를 따르고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다수에 비해, 그런 사회체계는 올바르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소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소수들은 자신들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투쟁해왔다.

그리고 이들이 소수에서 벗어나는 순간 혁명이라는 것이 발발하게 된다. 혁명의 결과로 사회체계가 변화하고 ‘○○주의자’의 비율 역시 역전되며 사회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것의 반복된 역사를 거치며, 오늘날 우리는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사회체계에서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라고 칭하며 살아가고 있다. 현대에 와서는 위의 것들 외에도 성 정체성, 문화 정체성, 세대 정체성 등 그 가짓수도 더욱 많아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 같은 일반 시민이 갖고 있는 정체성에는 무엇이 있을까?

일단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정치체계와 경제체계에 대한 것이 있을 것이다. 아마 지금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다수의 국민들은 민주주의자이자 자본주의자일 것이다. 물론 스스로 “나는 민주주의자이며 자본주의자입니다.”라고 자랑하듯 말하는 사람은 드물겠지만, 그만큼 우리는 그런 정체성에 매우 익숙해져 있기도 하다.

반대로 누군가 “나는 독재주의자입니다.” 혹은 “나는 사회주의자입니다.”라고 밝히면 우리는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이 사회에서 독재주의나 사회주의에 찬동하는 발언을 하는 것 자체가 용납되지 않을 정도로, 우리는 특정한 사고관이 디폴트값인 사회에 살고 있다.

사회구성원들은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담론에는 동의하면서도, 자신과 사회와는 다른 ‘○○주의자’에 대해선 존중하기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기야 어려서부터 우리는 반드시 민주주의자이며 자본주의자이어야 한다고 교육받아왔으니 당연한 처사일 수도 있다.

우리는 서로 투표를 독려하고, 투표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밝히며 민주주의를 직접 실천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돈을 많이 버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고 부자를 선망하며 매일을 자본주의의 최전선에서 살아가고 있다. 대체 왜 그런 것일까?


kike-algarra-_Fcwd09w5PE-unsplash.jpg Copyright 2018. Kike Algarra

나는 그 이유를 사회체계가 지닌 한계에서 발견하고자 한다. 사회체계에는 매우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바로 그 체계를 따르는 이가 없다면 체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상상해보라. 모든 국민이 투표를 하지 않고 세금도 내지 않고 정부기관을 따르지 않는 사회를. 그런 사회를 민주주의 사회라 부를 수 있겠는가?

상상해보라. 모든 사람이 거래는커녕 생산과 소비조차도 하지 않는 사회를. 당연히 자본주의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다.

결국 우리가 따르는 사회체계라는 것은 우리가 따르기 때문에 존속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또 다른 사회체계를 따르는 이들이 생기면, 지금의 사회체계는 위협당하게 된다. 그러기에 지금의 사회체계를 따르고 선호하는 이들일수록, 다른 사회체계의 존재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적대시할 수밖에 없다.

아마 우리가 어려서부터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익숙해지고 교육받는 것도 이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이와 반대되는 개념인 독재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해선 올바르지 않다는 관념까지 자연히 생겨날 정도로.

우리가 그만큼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인접국가라는 실질적 위협이 존재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단순히 형이상학적 가치관이 아니라 당장의 생존이 걸린 문제이기에 적대시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는 바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옳으냐, 독재주의가 옳으냐, 자본주의가 옳으냐, 사회주의가 옳으냐는 것이 아니다. 내가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는 한 명의 ‘○○주의자’라는 정체성을 지니고, 정체성으로 만들어진 사회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malcolm-lightbody-TC2f02Iq8lE-unsplash.jpg Copyright 2018. Malcolm Lightbody

위에서 말한 대로 우리는 자신과 다른 ‘○○주의’를 따르는 이들에게 반발심을 가진다. 같은 체계를 따르는 이들이라도 그 지향성이 무어냐에 따라 갈라지기도 한다.

특히 나는 선거철이 될 때마다 이런 것을 몸소 뼈저리게 느낀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모든 유권자는 자신이 원하는 투표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다. 그럼에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다른 이들이 자신과 일치하는 투표권을 행사할 것을 원한다. 툭 까놓고 말하자면 내가 지지하지 않는 후보에 투표하는 것을 싫어한다.

모두 민주주의가 어떤 체계인지는 충분히 학습하고 체화해왔음에도, 그 민주주의에 따라 투표하는 것은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참으로 모순적이지만 모두가 이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민주주의라는 사회이다.

비단 투표만 그러한가? 어느 정당의 당원이냐, 어느 법안에 찬성하느냐, 어느 집단에 소속되는가 등을 기준으로 우리는 호불호를 정하곤 한다. 모두가 자유롭게 정치활동을 할 권리가 있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제도임에도, 우리는 나와 반대되는 누군가가 정치활동을 하는 것에는 거부감을 느낀다. 어찌 보면 반민주주의적이라고도 생각되는 행동이다.


정치 외에도 자신이 지닌 정체성과 반대편에 서 있는 정체성을 지닌 이들에 대해서도 우린 적대심을 갖곤 한다. 계층에 따라, 직업에 따라, 출신지에 따라, 학력에 따라, 성별에 따라, 나이에 따라, 인종에 따라.

나와 반대되는 정체성을 지녔다면 이유 모를 편견을 갖게 되고, 그 정체성을 지닌 집단을 일반화하고, 그를 나와 다른 타자로 생각하게 된다. 오늘날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이런 정체성에 따른 갈등이 발생하는 분야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끝이 없을 정도다.

이처럼 우린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도 정체성의 간극을 매우지 못한다. 심지어 자신의 애인이나 가족, 친구와 같이 친밀한 사람에게서도 이 간극을 느끼곤 한다. 아무리 오랜 기간동안 깊은 관계를 쌓아왔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나와 반대되는 정체성을 드러내면 갑자기 배신감을 느낀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수많은 시간 동안 함께하며 둘도 없을 친분과 추억을 쌓아온 우리가, 단순히 특정한 정체성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적대감이 생겨나다니. 그만큼 우리는 ‘정체성’이라는 것이 한 인간을 대표하는 척도처럼 인식하고 있다.


tom-podmore-BOWR0pwpk1A-unsplash.jpg Copyright 2021. Tom Podmore

개인의 수준에서의 정체성 충돌만 하더라도 이러하다. 그런데 이 정체성의 충돌이 사회적인 수준에서 발생하게 되면 어떠하겠는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전쟁일 것이다.

우리 인류는 지난 몇천 년의 세월 동안 전쟁을 해왔다. 2024년 지금도 지구 어딘가에선 전쟁이 이어지고 있다. 전쟁의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그 중 하나로는 정체성의 대립이라는 원인도 분명히 존재한다.

오늘은 전쟁사를 이야기하는 자리가 아니므로 구구절절 이야기하진 않겠다. 그러나 인류사의 굵직한 전쟁들, 이를테면 십자군 전쟁이나 프랑스 혁명 전쟁, 세계 대전, 냉전 등만 보더라도 정체정의 대립이 원인으로 작용한 것은 분명하다. 여기에 적지 못한 각종 전쟁까지도 포함하면, 각국이 지닌 가치관과 정체성의 충돌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는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아예 다른 국가끼리의 전쟁도 비극적이지만, 같은 사회의 일원들끼리 벌이는 내전은 그 비극성이 더 극대화된다. 내전을 일으킨 모든 주체는 하나의 공통된 사회체계에서 살아간 인간들이다. 그런 이들이 서로 다른 가치관과 정체성을 지녔고, 그 간극을 매우지 못해 서로에게 물리력을 행사하면 내전이 발생하게 된다.

불과 어제까진 서로 아침마다 얼굴을 마주 보고 인사하던 사이가, 오늘은 총구를 겨누고 죽여야 하는 대상이 되어버렸다. 단순히 서로의 생각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말이다. ‘모든 전쟁은 내전이다.’라는 오래된 격언¹을 생각해보면, 어쩌면 우리 인류는 이런 비극을 되풀이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것도 같다.


전쟁은 가장 극단적인 갈등의 발현이다. 전쟁으로 발전하기 전까진 크고 작은 갈등들이 연속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갈등의 주체가 된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에서 억압과 핍박을 받으며 전쟁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

여러분이 갑자기 몇백 년 전의 어느 국가에 툭 떨어진다고 생각해보자. 민주주의 국가에서 태어나 민주주의자로서 살아온 여러분은, 과연 그 국가에서도 민주주의를 주장할 수 있을까? 자신에게 천부적인 연설 능력과 카리스마와 무력이 없는 한 아마 어려울 것이다.

불과 몇백 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 인류에겐 군주제는 당연한 사회체계였다. 왕을 없애고 모든 사람들의 투표를 통해 지도자를 선출하고 이것을 몇 년 단위로 반복하자고? 이런 주장은 미치광이의 헛소리처럼 취급받기 마련이다. 아니, 그나마 그런 취급을 당하면 다행이다. 어쩌면 반역자로 찍혀 감옥에 갇히거나 생명이 위협당할 수도 있으니까.

아마 당시를 살아간 이름도 모를 누군가는 진지하게 이러한 주장을 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필 적절치 않은 시기에 적절치 않은 지역에서 태어났기에 그는 자신의 가치관을 실현하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오늘 날 세속적이지 못한 국가에 태어나는 이들은 어쩔 수 없이 그 사회가 강요하는 정체성을 따라야만 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비단 옛날이야기라고 치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여러분이 강경한 종교 국가, 혹은 비민주주의 국가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해보아라. 지금 지니고 있는 당신의 그 정체성이 과연 그 상황에서도 똑같이 형성되었을까?


igor-omilaev-VyD_UzTDm9o-unsplash.jpg Copyright 2023. Igor Omilaev

그 가치관과 정체성이 옳고 그르냐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그 사회의 주류와 일치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한 명의 개인이 지닌 정체성이 나머지 99명과 다르다면, 그 간극을 매우는 가장 쉬운 방법은 한 명을 묵살시키는 것이다. 결국 민주주의자란 왕정국가에서는 부적응자이자 반역자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닌 민주주의자라는 정체성은 실체가 있는 것일까? 다시 말해 우리는 정말로 우리가 민주주의자가 되고 싶고 민주주의를 마땅히 따라야 할 가치관이라고 판단해서 민주주의자가 된 것일까?

어쩌면 그런 이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국민은 그저 민주주의 사회에 태어나 자랐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민주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다. 군주제 국가에서 태어난 이들이 군주주의를 따르듯이 말이다.


결국 우리가 지닌 정체성이라는 것은 그 사회에서 용인되는 것에 한하여 지니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은 이들은 많은 고난과 역경에 처하게 되고, 그러한 사람들이 누리는 평범한 삶을 누리는 것조차 쉽지 않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 사회도 예외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런 소수의 정체성을 지닌 이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나도 이것에 대해 나름 고민을 해보았지만, 아직까지는 이렇다 할 답변을 도출해내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내가 소수에 속하지 않는 인물이기 때문에 생각해내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몇몇의 소수자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그들의 삶이 어떠한가에 대해 이야기 들은 바는 있지만, 단순히 아는 것과 직접 겪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이다.

jakob-owens-VWhTvKgT9B0-unsplash.jpg Copyright 2020. Jakob Owens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나는 이분법으로 나눈다면 주류에 속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인 가정에서 수도권 생활을 영위했고 정규 교육과정을 거쳐 평범한 사회 조직에 몸담아왔으며, 내 정체성 역시 타인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내가 이 정체성 담론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최근 들어 내가 지닌 정체성들이 진정으로 나 자신의 선택에 의해 형성된 것이 맞는가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게 되면서였다.

남성이라는 정체성, 핵가족의 자녀라는 정체성, 학력과 계층에 대한 정체성, 20대 청년이라는 정체성, 한민족이라는 정체성, 민주주의자라는 정체성 등.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많은 정체성들 중 과연 내가 선택해서 만들어지게 된 것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스스로가 이렇게 만들어진 정체성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스스로를 칭할 때 어떤 정체성까지만 내세울 수 있는 것일까?


주류에 속하는 나조차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을 하는데, 비주류에 속한 이들의 고민은 얼마나 깊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들이 겪는 고난과 역경 역시 나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이 사회에 용인될 수 있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자신들만의 조직을 이루고 정치적 운동을 하거나 미디어에 홍보하는 방법이 주가 된다. 물론 이것이 곧장 성과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오늘도 다수와 주류에 맞서고 있다.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대한민국 사회에선 이런 정체성이 용인되고 다수가 되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릴 것도 같다. 그러나 동시에 차근차근 우리의 사회가 변화해가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지금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다양한 가치관과 정체성이 존재하는 세계에 살고 있지 않은가?

이런 변화가 반가운 이들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을 것이다. 무엇이 되었든 간에 확실한 것은 앞으로의 사회는 지금과 똑같지는 않으리라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것도 한낮 과거의 산물에 불과한 무언가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미래가 도래하면 우리는 스스로의 정체성이 시험받는 순간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과연 나는 그때가 되더라도 나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나는 도저히 모르겠다.







[각주]

¹. All wars are civil wars because all men are brothers. Francois Fenelon(1651~1715)가 말했다고 알려진 격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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