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은 포도 한 송이 누가 버리나?

결혼 초 첫 싸움에 부딪힌 그대들에게

by 모두미

결혼 초 한참 알콩달콩 깨소금 볶을 시절이 있었다.

보기만 해도 두근거리고 함께 있기만 해도 영화의 한 장면을 찍는 듯 행복 했던 그 시절.

나에게도 그런 신혼 초가 있었다.

그런 우리에게 썩은 포도가 나타났다.

썩은 포도는 그냥 썩은 포도가 아니었다. 우리의 신혼의 환상을 제대로 깨주는 포도였다.


과일을 좋아하던 남편과 나는 계절마다 과일을 박스채로 사다 놓고 먹곤 했다.

포도가 한창이던 때였다. 포도 박스를 부엌 쪽에 놓아 둔 채 먹고 싶을 때면 포도를 씻어 오곤 했다.

그날도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남편이 한참 출근을 준비할 때 쯤 이였다.

설거지를 마치고 거실로 가는데 포도 박스에 제대로 섞어 곰팡이 까지 생겨 하얗게 변해 버린, 손도 대기 싫은 썩은 포도 한 송이가 있지 않은가?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던 썩은 포도 한 송이.(결혼 10년 차가 된 지금 나에게 썩은 포도 한 송이 정도는 한번에 버릴 수 있지만 26살 새댁이었던 나에게 썩은 포도 한 송이는 정말 만지기 조차 싫은 존재였다.)


그래. 내게는 든든한 남편이 있었지? 나는 곧바로 남편을 불렀다.

“여보! 잠깐만 여기 와봐. 여기 썩은 포도 버려줘요.”

“뭐?” 제대로 못 들었던지 옷을 입으며 그가 거실로 나왔다.

“여기 썩은 포도.... 난 못 버리겠어.” 난 나름 귀여운 얼굴과 애교 섞인 얼굴로 남편에게 포도를 따달라고 이야기 하고 있었다.

“아니 무슨 포도 하나 못 따서 날 부른 거야? 참! 이런 거 정도는 당신이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정색하는 남편의 얼굴에 난 아무래도 나의 애교가 부족했었나 하고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이야기 했다.

“여보, 포도 좀 버려 주세용~~~”

나의 코맹맹이 애교 소리를 듣던 남편은 더욱 화가 난 듯 인상을 찌푸리고는 가버렸다. 뭔가 잘못 되고 있었다.

그때 까지 난 나의 애교 섞인 목소리라면 남편이 뭐든지 해 줄 것이라 믿었었다.

하지만 그날 모든 환상이 깨지고 말았다. 그 썩은 포도 한 송이 때문에 결혼 초 처음으로 크게 싸웠다.

썩은 포도 한 송이 못 버려 주냐는 나와 그런 것 까지 남편을 시켜야겠냐는 남편.

지금 돌아보면 정말 별 일 아닌 것을 가지고 크게 싸웠다.

나중에 남편에게 들은 바로는 그때 이 여자가 날 우습게 아나? 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래서 결혼 초 기강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그 썩은 포도를 모른 척 하고 출근을 했다고 한다. 매정한 남편 같으니라고!


그 대박 포도 사건 이후로 비록 우리 꿈같은 신혼의 환상이 깨지긴 했지만 부부로써 서로를 조금씩 알게 된 계기가 됐다. 적어도 썩은 포도는 내가 버려야 한다는 냉정한 현실 같은 것 말이다.

이 글을 적으면서 남편에게 물어 봤다.

“여보 당신 그거 기억나? 썩은 포도 한 송이 버려달라고 했던 거에 버럭 화냈던 거.”

“내가 그랬었나? 난 기억 안 나는데.”

정말 기억이 안 나는 표정이었다. 어쩌면 그에게는 그저 지나가는 하나의 사건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평생 잊지 못할 썩은 포도 대소동이었다.

결혼 전 아무리 많은 인생 선배들이 우리에게 결혼의 현실에 대해 이야기 해주어도 결혼 초 우리는 솜사탕 같은 달콤함만을 기대 한다. 그래서 청국장 같은 현실이 닥쳤을 때는 그 청국장의 구수한 냄새조차도 부인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주 다투어 가며 서로에게 맞추다 보면 청국장 같은 구수한 맛에 익숙해진다. 그리고 그 맛을 잃고 싶지 않아 진다.


결혼 10년차.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아직도 내가 모르는 남편의 모습들을 볼 때가 있다.

하지만 이제는 바르르 화를 내며 소리 지르기보다는 자리를 피한다. 그러다 보면 그의 상황이 이해가 되거나 내 마음이 가라앉는다. 아마 십년간 남편과 살아오며 터득한 나만의 노하우일지도 모르겠다.


난 로맨틱 드라마와 같은 부부 생활을 꿈꾸는데 남편은 자꾸 다큐멘터리 같은 리얼한 삶을 보여 준다.

난 10년이 됐어도 로맨스 영화를 꿈꾸는데 남편 너무 현실적이다.


내가 꿈꾸듯이 드라마에 나오는 그 꿈같은 결혼생활이 아닐 지라도 어느새 남편은 나의 인생에 꼭 필요한 소중한 소울 메이트가 되어있었다. 같은 꿈을 꾸고 함께 일하면서 서로에게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서로의 든든한 후원자이고 또 꼭 필요한 상담자이다.


어쩌면 또 다시 우리의 결혼 생활에 그 때의 썩은 포도처럼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다 무너진 것 같이( 솜사탕이 물에 다 젖어 없어진 것을 본 아이 처럼) 그렇게 좌절하고 실망 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구수한 청국장이 좀 더 맛을 내기 위한 과정이라고 받아들이고 앉아서 청국장 냄새를 만끽할 것이다.

그렇게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어디서도 맛보지 못한 끝내주는 청국장을 먹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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