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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두미 Jan 27. 2020

아빠가 인도에 왔다

아빠는 당연히 그렇게 살아가는 거라 생각했다

인도에 산지 10년 차가 되었지만 가족들 중 아무도 우리 집을 방문하지 못했다. 모두들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고 바쁘게 살아가고 있었던 터라 우리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빠가 언제부턴가가 흘러가듯 인도를 한번 가 봐야지 하고 이야기했다. 나는 누구에게도 부담 주는 것을 싫어한다. 그 상대가 가족이어도 말이다. 그래서 아무래도 힘들고 먼 인도 여행을 선뜻 오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런데 남편은 달랐다. 부모님과 전화할 때마다 남편은 말했다.

“장인어른. 인도 한 번 오셔야죠.”

“그래. 자네 사는 거 보러 가봐야지. 내 한번 갈게.”

두 사람의 대화가 여러 번 오고 간 지 꽤 시간이 지난 후 아빠는 정말 인도를 방문하셨다. 아빠는 영어도 잘 못하시고 해외에 혼자 나가 본 적이 없어서 아는 지인이 우리 집을 방문할 때 함께 오셨다. 그렇게 아빠가 16일 동안 우리 인도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아빠. 시장에 ‘멜라’라고 야시장이 열리는데 가보실래요?”

“그래? 좋지. 나가보자.”

아빠는 색다른 인도 야시장을 손자와 손잡고 거니셨다.

“야. 근데 저건 뭐노? 여기저기 많이 팔던데.”

“아. 아빠. 그건 빠니 뿌리라는 건데 인도 독특한 맛이 나는 길거리 음식이에요.”

빠니 뿌리는 안 속이 텅 빈 아주 작고 동그란 과자에 구멍을 내서 감자 커리를 넣고 빠니 뿌리만의 특유한 소스를 넣어서 먹는 인도 대표 길거리 음식이었다. 나는 빠니 뿌리의 맛이 강한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아빠에게 드시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빠가 그 음식을 시도 할리 없다고 생각했다.

멜라 시장을 다 돌고 나오는데 팝콘이 보였다. 나는 팝콘을 사기 위에서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 팝콘 좀 사 올게요.”

“해옥아. 무슨 팝콘이고. 뭐 살 거면 저거 한번 먹어보자.”

아빠의 손이 가리키는 곳은 바로 빠니 뿌리 장사가 서 있는 곳이었다.

그제야 나는 아빠가 빠니 뿌리를 먹어 보고 싶으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눈치 없는 딸내미하고는’

“아. 네. 아빠. 일로 와보세요. 이거 현민이가 엄청 좋아하는 거예요.”

할아버지 이렇게 먹는 거예요

현민이는 할아버지에게 어떻게 먹는 것인지 자세히 설명해 주면서 자기가 먹는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아빠는 빠니 뿌리 하나를 맛보시자마자 눈을 찌푸리시면서 이야기하셨다.

“아이고. 뭐 맛이 이렇노. 아이고 또는 못 먹겠다.”

덕분에 현민이는 할아버지가 남긴 빠니 뿌리까지 먹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아빠는 어떤 음식을 보아도 맛을 보셨다.

“야. 해옥아. 여행이라는 게 다른 게 있나. 이렇게 그 나라의 길거리 음식들을 먹어 보면서 경험하는 거지.”

아빠가 오셔도 아이들 학교와 바쁜 업무 때문에 타지마할도 못 모시고 간 딸의 죄송한 마음을 아셨던지 아빠는 몇 번이고 내게 이야기하셨다.

며칠 뒤 아빠는 인도 청년들과 함께 트럭을 타고 3시간을 가서 실리구리 구경을 했고 돌아오는 길은 일반 기차를 탔다. 일반 기차에는 앉을 좌석이 없어서 서오다가 문 근처에 자리가 나서 바닥에 앉아왔다면서 찍어온 사진들을 보여주셨다.

“야. 해옥아. 오늘 진짜 좋은 경험 했다. 기차를 탔는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자리가 없는 거야. 근데 나중에 바닥에 앉아 있던 할아버지가 내려서 거기서 존이랑 지믹이랑 같이 바닥에 앉아서 왔다. 잘무리라는 티밥 같은 거를 먹는데 얼마나 매콤하던지 맵다고 눈을 찌푸리니까 인도 사람들이 날 보고 다 웃는 거라. 가난한 사람들이 기차를 타는데 다들 행복해 보이더구나. 한 아빠가 아들을 위해서 장난감을 사가는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였어. 한국은 기차를 타도 너무 조용한데 인도는 시끌벅적 사람 사는 것 같더라. 꼭 옛날 우리나라 비둘기호 같았어.”

아빠는 피곤도 잊으신 채 아빠가 직접 본 인도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내게 이야기하셨다.


“내가 말이야. 기차에 오면서 핸드폰으로 글을 썼다니까.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생각하는데 참 이게 진짜 여행이구나 싶었어.”


아빠는 소풍을 갔다 온 어린아이처럼 몇 번이고 내게 그날 있었던 경험들을 이야기해 주셨다.

남편과 함께 간 한 모임에서는 아빠가 인도 사람들처럼 손으로 밥을 먹으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놀라고 또 놀랐다.


내게 아빠는 항상 무게 있고 진지하시면서 안동 외에는 아니 한국 외에는 특별히 다니시지 않는 그런 평범한 시골 아버지였다.

내가 초등학교 때 아빠의 모습은 2층 양복점에서 미싱 앞에 앉아 천과 실을 가지고 일하는 재봉사 아빠였고 내가 중학교 때 아빠는 생선 장사, 과일 장사, 야채 장사를 하느라 매일 트럭을 몰고 다니는 트럭 야채장수 아빠였다.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쯤 아빠는 밤새 회사 택시를 몰고 돈을 벌로 다니는 택시 기사 아빠였고 대학교를 졸업할 때쯤 아빠는 막노동을 시작하신 초보 목수 아빠였다.

내가 인도에서 살고 있는 동안 아빠는 새벽 5시면 어김없이 일하러 나가시는 현장 소장이 되어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하시는 건설 소장 아빠였다.

내 기억에 아빠는 항상 일을 하셨고 그것 외에는 관심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이번에 인도에 오신 아빠의 모습은 내가 아는 아빠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도전하고 새로운 것 시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여전히 젊은 청년의 아빠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여행을 하며 그 복잡한 기차 안에서 인생을 느끼며 글을 쓸 수 있는 글을 쓰는 아빠였다.


아빠의 새로운 모습을 봤다는 이야기를 들은 한 지인이 내게 말했다.

“어쩌면 아빠는 평생 가족을 먹여 살리느라 자기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꾹꾹 참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이제는 자식들 모두 가정을 만들고 안정되게 사니까 본인이 꿈꿔 왔던 것들을 시도하는 게 아닐까요?”

나는 자전거를 타고 잘 정돈된 우리 집 앞 흙길을 달리시는 아빠의 모습을 보았다.

아빠는 일하고 우리를 위해 살아가시는 것만이 당연한 모습이라 생각했던 내 생각이 참 부끄러웠다. 아빠도 꿈이 있고 하고 싶은 것이 있는 것이 당연한데. 나는 지금에라도 아빠의 그런 모습을 발견한 것에 감사했다.


아빠. 이제는 아빠의 꿈을 소망을 이루며 살아가세요. 제가 응원할게요.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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