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반짝풍경 Apr 14. 2022

늘 아픈 사람에게는

만성 난치성 질환자의 몇 가지 바람

여러분은 '병'이라는 단어를 앞에 두면 무엇부터 떠오르시나요? 나아야 할, 벗어나야 할, 퇴치해야 할 것.


그런데 지구 상의 수많은 이들이 낳지 않고 병과 함께 살아갑니다. 병은 당연히 퇴치되어야 하고 나아야 한다는 중간지대가 없는 사회적 통념이, 어떤 이들에게는 폭력이 될 수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이 사회는 건강한 사람을 기준으로 만들어져 있다. 모두는 건강해야 하고, 건강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어떻게든 건강한 상태로 '되돌려'져야 한다. 그렇게 이 사회는 모두를 건강한 상태로 만들려고 한다. 얼핏 보면 좋은 이야기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이는 건강해질 수 없는 사람들을 벼랑으로 내모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안희제, 난치의 상상력, 동녘 출판





| 낫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저는 20대 시절부터 디스크가 있었습니다. 안타깝지만 남동생도 역시요. 그리고 친정엄마가 오랜 기간 심한 디스크와 협착증으로 인해 힘들어하시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에, 허리가 고장 나 사나흘쯤 침대에서 못 일어나는 자신의 상태에 그다지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는 걸 아니까요. 저희 집안에서는 '상식'이자 자연스러운 이 논리가, 전혀 공감받지 못하는 경험을 한 것은 제가 서울 서초동 소재의 모 상담 센터에서 개인 분석을 받던 시절 이야기입니다.


       주간 허리 고장으로 침대에 누워 꼼짝   덕분에 상담을 한차례 쉬어야 했던 사정을 이야기하는데 저의 예상과는 달리 상담사분의 반응이 날카로웠던 겁니다. 계속 내담자인 저와 상담사 선생님 사이의 대화는 겉돌았고 이게 무슨 상황인지  길이 없었죠. 허리가 고장 나면 당연히 치료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지라는 지적과,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로 탈이 났을 때는 병원에 가는 것보다는 회복되기까지 누워 쉬어주면 되고 평소에는 운동을 해서  근육을 강화하면 된다는 저의 답이 반복되는 시간이었죠. 삐끗했다면야 물리치료라도 받겠지만 아침에  뜨니 허리에 힘이  들어가 일어나지 못하는  병원에 어찌 가라는 건지...  저는 기이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상담사분은 답답해 분통이 터져 보였지요.  사이의 좁혀지지 않는 공감대는 사실, '통증' 대한 이해의 간극이 너무 컸던 탓이었는데 말이지요. 제게 통증은 관리해야 하는 자신의   컨디션이었고, 상담사분께 통증은 하루빨리 치료하여 벗어나야 하는 정상이 아닌 상태였던 겁니다. 만성 통증이나 난치병의 증상이 딱히 이유가 없어도 날에 따라 악화되기도 하는 것도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없었습니다. 상담사의 생각에 건강관리를 위한 부지런함은 저의 몫이고, 건강관리에 게으른 나약한 내담자를 타이른 것이죠. 10 년도  지난 예전의 일입니다.



    건강권의 문제가 개인이 아닌 국가적 차원에서 접근할 인권과 복지의 문제라는 인식이 이전보다는 늘어난 요즘이라고 해도, 여전히 '질병'과 '장애', '만성질환'과 '난치'에 대한 보편적 인식이 크게 발돋움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사회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생산성이 떨어지는 구성원은 사회 구조의 테두리 바깥쪽으로 밀려나갑니다. 건강치 못한 개인은 자기 관리에 실패한 나약한 한 사람이 됩니다. 안희제 씨의 표현처럼 "건강만이 지고의 가치인 건강 중심주의 사회에서 환자는 낫거나, 죽어야(안희제, 난치의 상상력, 들녘, p.241)"합니다.




 | 몰이해, 무신경함 그리고 노여운 상처


    [난치의 상상력]의 저자 안희제 씨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하여 '기저 질환'이라는 단어가 주목받게 되었는데 사실 disease보다는 condition의 표현이 더 바람직하지 않은가 언급합니다. '기저 상태'라는 표현은 몸과 병명을 넘어서 그 사람의 의료 사회적인 상황과 생활환경까지도 포함한 용어로 사용 가능하다는 언급과 함께요. 건강의 문제는 인권의 문제, 인간으로서의 품위 유지의 문제입니다. 사람이 빵만으로 살 수 없고 장미도 필요하듯이, 병과 건강 유지의 문제란 '몸'의 범위를 훌쩍 벗어나 한 생애의 존엄성 유지에 대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란 그처럼 복잡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만성 난치성 질환을 앓고 있는 수많은 이들에게는   선택지 어디에도 발붙일 구석이 없습니다. 아픈 사람이지만 아프지 않은 사람처럼 생활을 영위하는,  중간지대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해나가는 존재. 당장 증상이 표면으로 오르지 않은 시기에는 그것이 가능한 발현되지 않도록 자신의 몸의 소리에  기울이고, 세밀히 스케줄과 일상의 모든 반경을 조절해야 하는 만성질환자의 삶을 건강한 사람이 온전히 이해하기란 어렵습니다.  중에는  "  하니 멀쩡한  안다"라는 한탄도 많이 하거든요. 이해는커녕 단지  엄청 사리는 겁쟁이이거나, 게으르거나, 핑계가 많거나, 유난한 사람 취급당하기 십상이지요. 반대로 '아픈 사람'이라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반쪽짜리 존재로 내려놓거나요. 실제로 난치 만성질환자를 보편적인 수준의 사회생활을 영위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장애 범주에 묶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으니까요.


    "낮은 생활 수준은 그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인간의 위엄과 존중에 대한 모욕으로 작동하기에 더 큰 문제(리처드가 윌킨슨, 건강불평등, 이음)"라고 지적한 리처드 윌킨슨의 문장을 빗대어 표현하자면 '만성적인 통증은 그 자체도 문제이지만 존재의 존엄성을 깎아내고 치욕을 안겨주기에 더욱 큰 문제'일 겁니다.  만성통증과 난치성 질환자들이 "건강한"이들의 몰이해와 무신경함을 맞닥뜨리게 되면 노엽고, 상처받습니다. 가족으로부터, 친지로부터, 동료나 친구 또는 이웃으로부터 그리고 주치의로부터도 그런 상황을 겪습니다.



     크리스천이라면 만성질환을 앓는 지체의 가정에 심방을 가서 "아프다는 핑계로 예배를 소홀하게 하지 마시고" 같은 문구는 삼가시길 바랍니다. 의도든 아니든 기도를 빙자하여 정죄하는 결과가  테니까요. 골방에서 홀로 그를 위해 그렇게 중보 기도하는 거야 상관없습니다만. 이미 아픈 지체의 귀가  문장을 듣게 하지 마세요. 주님은  누구보다 약자의 아픔을 공감하신 분입니다. 상담사분들은 만성 난치성 질환,  수술을 치르고 회복 중인,  투병 중인 내담자의 상담 전에는 내담자의 바로 머리 위에서 냉기를 뿜어내는 에어컨을 꺼두는 식의 배려를 하실  있지요. 미리 틀어 적정 온도를 맞춘  그가 방문할 직전에는 끄면  일입니다. 아니면 끄는  좋을지 물어봐 주실 수도 있고요. 투병 중인 내담자의  컨디션에는  냉기가 뼛속까지 시려서 상담 시간을 영 망치는 결과를 가져올 지도 모릅니다.



    만성질환자는 대체로 의사들에게 일정의 불신을 품고 있습니다. 몸에 실재하는 여러 증상과 통증을 호소할 때면, "그럴  없다"던가 "검사 결과로는 문제없다"거나 " 약에 그런 부작용이 없다"라는 데이터에 기반한 반응이 돌아옵니다.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또한 분명 존재하는 불편함을 정면으로 무시당한 사태에 환자는 거짓말쟁이 취급을 당한 듯한 수치심과 의사의 공감 능력 제로 상태에 대한 분노, 잘난 의학에 대한 불신이    쌓이는 경험을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의사는 의사일 , 병증과 통증의 당사자가 아닌걸요. 이성으로는 이해하면서도 통계와 데이터가 실재하는 통증보다 진리라는 태도에 의아한 것이 환자의 입장입니다. 당사자가 아프다는데 "아플  없다"니요? 주변의 몰이해를 바탕으로  무신경한 반응들은, 난치라는 특이성을 지니고 살아가는 존재에게 거절감과 상처를 안겨줍니다. 그것은 익숙한 통증과는 다른 노여운 상처입니다.



 | 몇 가지 바람



      질병은 내 몸에만 발현되는 증상이 아니라 몸을 가진 개인, 그 개인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를 극명히 보여 주는 징표로서 작동합니다. 전선으로 연결된 작은 전구들에 일제히 불이 들어오듯 나와 연결돼 있는 관계의 실체가 고스란히 드러나게 만드는 질병은, 병을 치료받을 경제적 여건이나 사회적 자원이라는 전구에 불이 들어오지 않을 때 본격적으로 위력을 발휘합니다. 따라서 질병을 앓는 사람은 개인이 아닙니다. 가족, 의료, 소득, 주거, 환경... 삶과 관련된 모든 요소들이 이제 막 그가 짊어진 질병이라는 가방 안에 담겨 옵니다. 사람은 몸속 가장 깊은 곳까지 사회적 관계로 얽혀 있는 까닭입니다.

-김민아, 아픈 몸 더 아픈 차별, 뜨인돌, p.193-194


         그렇기에 '넘어진 이도 손잡아 일으켜서 끌고 가는 사회(리처드 윌킨슨, 건강 불평등: 사회는 어떻게 죽이는가?, 이음), '질병도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안희제, 난치의 상상력, 동녘), '국민의 건강이 기본권으로, 국가와 사회의 영역으로 다루어지는 사회(김민아, 아픈 몸 더 아픈 차별, 뜨인 돌)'를 함께 꿈꿔 봅니다. 작게는 내가 그리고 당신이 난치성 질환이나 만성 통증과 삶을 동행하고 있는 이웃을 적어도 고정관념으로 대하지 않기를. 그들이 아픈 것도 맞고, 아프지만 행복한 것도 맞는 우리와 동일하게 복잡한 생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대하는 이웃되기를. 수전 웬델의 고백처럼 만성질환이 만성적인 불행을 의미하지도, 만성통증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수전 웬델, 거부당한 몸: 장애와 질병에 대한 여성주의 철학, 그린비)을 이해해 주기를 바라봅니다. 안희제 씨가 그렸던 것처럼, 낫지 않고도 살다가 죽을 아프고 약한 채로 살다가 편하게 죽어갈 수 있는 세상 말이지요.



#반짝풍경 #건강불평등 #건강권 #난치병 #난치성질환 #만성통증 #기저질환 #만성질환 #늘아픈사람에게는 #아픈몸더아픈차별 #거부당한몸 #난치의상상력 #사회복지 #질병 #병 #질환 #건강관리 #수전웬델 #안희제 #김민아 #국민의건강 #장애 #질병 #인권 #삶의질 #통증 #만성난치성질환자의몇가지바람 #차별 #아픈사람



매거진의 이전글 어느 자기애자의 눈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