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티멘탈 밸류> 진정한 자유는 나에게로의 귀속

[영화] 요아킴 트리에 <센티멘탈 밸류> (별점: 4.5 강추!)

by 리뷰왕정리뷰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이란 있을 수 없는 거야

유명한 만화 <베르세르크>의 명대사라고 하는데, 많은 사람들에게 꽤나 잘 알려진 문구이다.

사실 너무 유명해서 오늘 글 쓰면서 찾아보기 전까지는 오래된 속담인 줄 알았다...ㅎㅎ


힘든 상황을 마주할 때 사람들은 각자의 방법을 찾는다.

역사적으로도 가장 유명한 방법이자 우리의 마음을 쉽게 빼앗는 방법은 바로 '36계 줄행랑', '회피기동'이다.

사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라는 격언도 있지 않은가...!


회피의 방법에도 많은 방법들이 있는데, 그냥 오감을 닫아서 아예 원천적인 자극을 차단해 버리는 사람들도 있고, 물리적으로 거리를 두는 사람들도 있고, 상대를 떠나도록 교묘하게 행동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전에 내가 생각하는 예술이란 '자기표현'이라고 쓴 글이 있다. (https://brunch.co.kr/@modure/12)

이 글에서도 잠깐 언급한 것처럼 어떤 사람들은 용기가 없어서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지만, 한편으로 누군가는 부족한 용기로 인해 자신의 상처를 감추고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예술을 찾는다.


그렇게 도망친 예술 속에 낙원은 없을 것 같다.

내가 환자들에게 트라우마의 치료에 대해 설명할 때 자주 쓰는 비유가 있다.

우리의 피부에 상처가 났을 때 어떻게 하는가? 소독을 하거나 상처가 깊으면 꿰맨다. 뼈가 부러지면 뼈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도록 붕대로 고정한다.

만약 상처를 그냥 방치하거나 지저분한 헝겊으로 대충 덮어두면 어떻게 될까? 부러진 뼈를 그냥 두면?

상처가 곪거나, 뼈가 구부러진 채로 붙어서 장애가 남을 것이다.


마음의 상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덮어두고, 회피하면 나을까? 그럴 리가 없다.

곪고 썩어버린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우리는 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부른다.

결국 치료는 지금 당장은 괴롭겠지만 어떻게든 상처를 다시 들여다 보고, 고름을 째고, 안에 가득 차 있는 농양을 빼고, 소독을 하고 꿰매어야만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상처는 더 곪고 결국 우리는 마음의 일부를 뚝 잘라내야만 할 것이다.


요아킴 트리에의 영화 <센티멘탈 밸류>는 도망치는 자들과 들여다보는 자의 이야기를 담은 한 편의 훌륭한 대리 경험이 되어준다.


*아래부터는 영화 <센티멘탈 밸류>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중요한 스포일러는 최대한 배제하였으나 예민하신 분들은 영화를 보고 읽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최근 '좋은 정신과 면담은 무엇일까요?' 하는 질문을 받았다.

어려운 질문이니만큼 짧게 대답할 수 없었고, 대답의 핵심은 결국 의사, 환자, 그리고 환경의 조화에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두 사람이 만날 때 중요한 것은 그 세 가지일 테니.


영화는 집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집은 관계의 환경이다. 정확히는 가족관계의 환경이다.

집에서 가족은 함께 이야기하고, 식사하고, 잠을 자고, 기뻐하고, 그리고 상처받는다.

주인공의 독백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지며 시작한다.

'집은 과연 그 상처들을 느낄까? 상처를 기억하고 간직할까? 그렇다면 집은 가족과 함께 있는 걸 원할까?'


영화는 결국 상처받은 이들이 집에서 예술로 도망치는 과정과 그 결과를 보여준다.

무대에서 공황 발작을 일으키는 주인공.

가족들과 제대로 된 소통은 하지 못한 채 윽박지르며 대본을 읽어보라는 아버지.


그들의 마음은 이미 낙원이 아니라 지옥에 있다.

안정적인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떠도는 주인공.

술에 기대어 모든 걸 잊어보려고 하지만 결국 기도를 하며 자신의 존재를 괴로워하는 아버지.


그렇게 누군가는 집을 떠나 예술로 도피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누군가는 역사를 통해 과거를 직면하고, 이야기한다.

'막상 그다지 아무렇지 않았다.'라고.


그렇게 현실을 마주하는 사람이 주는 영향력 속에서 도피하는 사람들은 다시 돌아온다.

그리 큰 의미가 있는 것 까지도 아닐지 모르겠다.

그냥 당신과 나의 관계에서 나는 기댈 수 있었노라는 한마디가 우리를 떠나갔던 집으로, 떠나갔던 상대방에게로, 떠나갔던 나에게로 다시 돌아오게 만든다.

그렇게 담담히 집을 떠나 예술로, 다시 예술을 떠나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자유를 꿈꾼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예술은 자유로워야 하는 거야!'라고 일갈을 하지만 그는 전혀 자유로워 보이지가 않는다.

사람마다 꿈꾸는 자유는 다르겠지만, 내가 없는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

나라는 닻을 단단히 내리고 세상 속에서 온전히 걸어갈 때 우리는 그것을 자유롭다고 부를 수 있으리라.

즉 진정한 자유는 나에게 귀속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센티멘탈 밸류> 별점: 4.5/5

이 글을 쓰고 나니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고 어떻게 느낄지 궁금하다는 생각이 든다.

글에서는 간단하게 예술과 회피, 직면에 대해서만 썼지만 사실 굉장히 다양한 주제들을 물 흐르듯이 녹여내면서 결코 소홀하게 다루거나 얕게 다루지 않는 아주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여주, 남주의 연기도 굉장히 훌륭하다.

한 대사를 여주인공이 할 때와 조연 엘 패닝이 할 때 주는 느낌이 정말 너무너무 달랐고, 특히 여주가 연기를 통해 엄청난 설득력을 주는 것을 보며 매우 크게 놀랐다. 영화가 주는 색다른 체험을 해 볼 수 있다.


번외)

베니스, 칸, 베를린,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작품들은 최대한 챙겨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근데 항상 뭔가 칸에서 상을 받은 영화들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이야기를 너무 어렵게 풀어내서 이해하기 어렵다고 해야 하나...

내 수준에는 너무 수준 높은 영화들 같았다 ㅠㅠ

그러나 2025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그저 사고였을 뿐>을 아주 재미있게 봤다.

절대 어려운 영화가 아니고 아주 직관적이면서도 큰 울림을 주는 영화다.

같은 해 칸 영화제 그랑프리 대상인 <센티멘탈 밸류> 역시 직관적이고, 대중성 관점에서도 괜찮은 영화다.

영화계가 점점 어려워진다는데 칸도 이제는 어느 정도 대중 타협을 하는 것인가...!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