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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May 31. 2023

아빠 보청기 빌려 쓰는 딸



"지금 상태면 장애등급입니다."   


금요일 오전 이비인후과는 대기실에 앉을 자리가 없을만큼 붐볐다. 원인모를 체기가 한달을 이어 위내시경 검사를 받으간김에 들린 길이었다. 이년 전 종합검진 결과표에 '청력 정밀검사 요함'이라 나왔는데 귀찮아 검사를 계속 미루고 있었다. 예약을 하지 않아 두 시간 가까이 기다리고서야 점심시간 직전 겨우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소리가 들리는 쪽 버튼을 누르는 순음 청력 검사와 뇌간 반응검사를 받았다. 헤드폰을 쓰고 앉으니 앞에 보이는 화면 위로 선들이 꿈틀대며 이상한 모양을 그렸다. 검사원이 말했다. "왼쪽이 많이 불편하셨겠네요." 그런가. 왼쪽이 더 안 들렸나.   


난청을 자각한 것은 5, 6년 전부터다. 높고 작은 소리가 들리지 않더니 언제부턴가 발음이 뭉개져 들렸다. 어떤 단어는 초코파이를 주물러 으깬 모양으로 귀에 들어왔다. 긴 대화는 중간 어디쯤 허물어진 기분이었다. 뜻을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어 되묻는 경우가 많아졌다. 다 들은 줄 알았는데 요일이나 장소, 시간처럼 중요한 내용을 놓쳤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기도 했다. 마스크를 쓰면 표정이 가려지고 입 모양이 보이지 않아 대화하기 더 곤란했다. 듣는 행위가 귀와 눈의 협응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잘 듣지 못하게 되면서 몇 가지 변화가 생겼다. 통화 대신 메시지를 더 많이 사용하고 밖에서 만나는 약속 피했다. 대면 강의는 들을 수 없고 회의는 자리만 채우는 꼴이라 빠질 이유를 찾곤 했다. 티브이 대신 자막이 있는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시청했다. 한국영화는 영화관에서 볼 수 없었다. 큰맘 먹고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을 개봉관에서 봤는데 대사를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키오스크가 없는 까페에선 주문이 불편했다. 뜨거운 커피 주세요 라고 말했는데 는 말에 뚱하게 대답했는지 아스 커피를 받기도 했다. 이런저런 경험으로 청각장애인의 고충을 조금 알게 됐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나는 청각 장애인이었다.       

   

"6개월 후 재검사하고 같은 결과가 나오면 장애등급 신청이 가능합니다. 복지카드가 나오면 보청기 구입할 때 국가보조금을 받을 수 있습니다."   


같은 증상이 6개월 후 질병에서 장애로 해석된다니 이상했다. "200년 전에는 장애인은 없었다." (김도현, 《장애학의 도전》) 는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대다수 인간은 질병을 안고 사는데 왜 그중 일부에만 장애라는 차별 단어 붙는지 궁금했다. 청각장애인 커뮤니티에서는 청각장애라는 단어 대신 '농인'과 '청인'으로 구별한다. 이어서 든 생각은 이 정도 불편으로 보조금을 받아도 될까였다.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촉구하는 지하철 농성이 기억났다. 보청기보다 더 시급한 곳에 예산을 써야 하지 않나 하다 장애 복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돈이 족해서가 아니라 장애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검사 결과를 묻는 아빠에게 '그렇다네' 하며 대수롭지 않게 전했다. '그렇게 안좋다드나.'하는 아빠 얼굴이 내 귀보다 더 나빠 보였다. 병원에서 장애등급이란 말을 들을 땐 별 거 아니었던 마음이 아빠 얼굴을 보니 중대한 병을 고백하는 기분이 됐다. 아빠는 자신의 보청기를 가져오더니 '이거 너 써라.' 하며 내밀었다. 아빠는 보청기 파는 곳에서 검사를 받고 1년 전부터 사용는 중이었다. 필요 없다 해도 성화여서 한 개를 받아 들었다. 아빠 앞에서 보청기를 귀에 넣는 상황은 같이 보고 있는 드라마에서 연인들의 키스가 느닷없이 시작된 순간 같았다. 별일 아닌 듯 굴었지만 표정짓기 어색하고 처음 귀에 넣은 보청기 감촉만큼이나 낯설었다.    

 

아빠는 나를 태중에서부터 오십 넘은 지금까지 지켜본 살아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나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알고 있는 지구 위에 단 한 사람이다. 아빠는 하나뿐인 딸을 예뻐했다. 걸음마 시작한 내게 어울리지도 않는 프릴 잔뜩 달린 옷을 입히고 하루종일 버스 운전하고 돌아오는 길 가게 문 닫을까 뛰어가 부라보 콘을 사서 집에 오곤 했다. 자신은 구경도 못한 대학교에서 딸이 공부한다 자랑스러워했다. 결혼하고 사는 모습을 기특해하고 쓰러진 엄마 병 구환 시켜 미안해했다. 지금은 귀 안 들리는 딸을 속상해한다. 팔십 된 아빠가 흰머리난 오십 넘은 딸을 바라보는 심정은 어떤 걸까.     


아빠와 나는 오랜 시간 엄마를 같이 돌봤다. 엄마는 간경화를 12년 앓다 돌아가셨다. 거실에서 넘어져 다리가 부러졌는데 지병때문에 수술할 수 없어 마지막 5년은 누워서만 지냈다. 부모는 병으로도 자식을 가르친다. 마를 보며 삶의 유한성을 깨닫고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할지 많은 생각을 했다. 아빠와 나는 소리내어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엄마로 의 병으로 노쇠함과 죽음에 관해 충분히 대화했다 믿는다. 엄마가 죽기 이년 전 아빠와 나는 ‘연명치료 거부’를 엄마와 함께 신청했다. 엄마가 죽고 일 년 지나 아빠는 ‘사후 시신 기증’을 서약했다.       

   

보청기에선 지직거리는 소리만 울리고 말소리는 별 차이가 없었다. 아빠 보청기가 쓸모없는 걸 보니 아빠 귀가 나보다 나은 모양이다. 몸을 상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라 하였으니 이런 생각은 불효가 될지 모르지만 사는 날까지 아빠가 나보다 건강했으면 좋겠다. 귀도 더 나빠지지 않고 눈도 잘 보이 보다 이도 튼튼하고 소화도 잘면 좋겠다. 근육도 많아 죽는 날까지 두 발로 걷고 힘도 나보다 세면 좋겠다. 이런 내 맘을 알면 분명 순리가 아니다 책하겠지만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마지막 순간까지 좋은 삶을 사는 것이란 말에는 아빠도 분명 고개 끄덕일 것이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아빠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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