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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Oct 23. 2023

커피 내리는 남자



아침엔 장이 커피를 내다. 회사 다닐 땐 믹스커피만 마시던 사람이 퇴직 후커피 내리는 재미를 깨우쳤다. 한 번씩 사 먹는 커피가 별로라 하는 걸 보면 자신이 추구하는 맛이 있 모양이다.


남자가 내려주는 커피에 환상이 있다. 파리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새 구두가 필요해>서 시작됐다. 




아무렇게나 둔 것 같지만 치밀하게 계산되고 배치되었을 미장센 부엌에서 센이 커피를 내린다. 커피 전문점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며 능숙한 손놀림으로 아오이에게 커피 내리는 방법을 설명한다. 여리여리 잘생긴 얼굴에 기다란 손가락, 하얀 셔츠를 입고 버버리풍 스카프까지 둘렀. '라면 먹고 갈래.'처럼 직설적이지 않고 '커피 마실래.' 같이 평범하지 않은 '커피 내려줄까요'라는 수작용어는 로망을 갖기에 충분했다. 



"처음엔 조금씩 떨어지는 정도로 하다가 호흡하듯이 살짝 말을 걸래." 센이 알려 커피 내리는 방법을 일러더니 장은 주전자를 한 손에 쥔 채 대꾸한다. ' 여자 꼬시는 법 같은데. 커피한테 말을 왜 걸어."  자고 일어나 헝클어진 머리 목 늘어난 잠옷 티셔츠를 입 드리퍼 하나로 두 컵을 왔다 갔다하며 좀 없어 보이게 커피 내리는 남자에게 건넬 말은 아닌 게 확실하다.


멋은 없지만 맛은 괜찮다. '원두가 좋아 그렇겠지'라고 생각하지만 말로 하진 않는다. 고맙다고 할 때도 있고 그 대신 '맛있는데?' 하기도 한다. 물음표를 붙이는데도 매일 맛있단 소릴 들어선 지 필요이상 자신감이 붙다. 지난번 친구들이 왔을 때 저녁 가까운 시간인데 굳이 커피를 내려주며 아침마다 자신이 커피 내린다 자랑하고 기어이 맛있단 소릴 듣고선 흡족해했다.


우리 집에서 드립커피를 가장 먼저 시작한 사람은 아빠다. 금도 원두는 아빠가 주문한다. 흰머리 지긋한 아빠 매일 커피를 내려 마실 때 나는 믹스커피를 애찬하고 하루에 서너 잔씩 마셔댔. 그러다 마흔 넘은 어느 날부터 소화가 어려워졌다. 엄마가 프림 소화 안된다 했을 때 이해를 못 했는데 그때 엄마 나이가 되고 보니 내가 딱 그 짝이다.


버터 넣고 오일 넣은 방탄커피도 한동안 마다. 오십이 넘어선 단백질을 먹어야 한다는 말에 요즘엔 커피에 콜라겐 가루를 한 스푼 넣어 마시기도 한다. 카페인 때문에 잠 못 잔다는 얘기가  말인 줄 알는데 즘엔 오후 4시 이후엔 가급적 마시지 않는다.  형편이 아닐 땐 이해 못 하던 사정들이 코 앞에 오고서야 이해된다. 커피 하나도 이런데 그러니 뭐가 됐든 큰소리쳐선 안된다.



커피조차 그땐 맞고 지금은 틀리다. 국민남편 안성기 씨가 '아내 사랑은 프리마~'하며 등 뒤에 숨겨 선물하던 때도 있었건만 시간이 지나니 뱃살의 원흉이 되고 '그래서 우유를 넣습니다'로 바뀌지 않았가. 커피이름도 어려워졌다. 지난번 갔던 카페는 원두 따라 종류가 얼마나 다양하던지 메뉴판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뭘 시켜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먹고 나서 맛있어 다시 시키려는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을 때도 있다.


오래 살면 살아온 경험으로 세상살이가 수월해질 줄 알았는데 경험은 과거가 되고 기억은 가물거린다. 사소한 것을 목소리 높여 주장하지 말고 사소해질 것에 고집부리지 않아야겠다. 나이 들어 편협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삶의 주변을 확장시키지 않아서다. 생각에 남은 자리가 있어야 다른 것에 마음을 주고 만나고 받아들일 가능성이 열린다. 제와 사랑한다고 프리마 한 봉지를 건넨다면 오래된 농담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고백은 실패할 가능성이 높을 테니 말이다.


아들이 커피 사서 들어갈까 하는데 이름 기억이 안나 결국 딸에게 물었다. 아무렇게나 말해도 알아들어 고맙지만 자꾸 아무렇게나 말해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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