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스물셋에 낳은 나는 사 개월이 지나도 뒤집질 못했다. 무슨 병이 있는 건 아닐까 심란했지만 동네 아줌마들은 젖살 올라 팔다리 통통한 나를 보며 '애가 좀 늦되네.' 할 뿐이었다. 동생 넷 중 셋을 업어 키웠지만 이렇게 늦는 애는 없었는데, 엄마 걱정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엄마는 누워서 제 손 빨며 노는 아기를 바라보다 알 깨고 나오려는 새끼를 위해 밖에서 살짝 금 내주는 어미 새처럼 뒤집기를 조금만 도와주자 싶었다. 손가락 끝을 방바닥과 아기 등 사이에 찔러 넣어 한쪽 몸을 살짝 들추는 순간 엄마 맘도 모르고 아기는 꼬집히기라도 한 듯 자지러지게 울었다.
그러다 어느 날 뒤집지도 않고 앉았다. 과정을 생략하니 앉는 건 또래보다 빨랐다. 늦던 애가 빠른 애로 등극한 순간 엄마는 어제까지 하던 염려를 잊고 앉기 월반한 딸이 기특했다. 아직 돌도 안된 아기가 계획이라도 있었던 듯 이럴려고 뒤집지 않았나 보다 자랑했다. 앉았을 때 들은 칭찬이 신났던지 애기가 이번엔 기질 않았다. 팔 개월이 지나도록 앉아서만 노는 나를 보며 동네 사람들은 다시 '애가 늦되네.'하고 엄마는 그 말이 싫었다. 기는 연습을 시켜야겠다 작정하고 아기 앞을 지날 때면 네 발로 엎드려 기어 다녔다. 속도 모르고 아기는 짝짜꿍 하며 천 기저귀 찬 뚱뚱한 엉덩이를 들썩이고 까르르 웃기만 했다.
그러다 애기는 그러니까 나는 어느 날 슬며시 잡고 일어나 바로 걸었다. 한 번 더 월반한 나를 동네 사람들은 '거 참 신기하네.' 라고 말하고 엄마는 돌 전에 걷는 날 보며 자신이 낳은 딸이 어딘가 특이하다 생각했다. 그래서 조기교육을 결심했다. 젖을 빨리 떼고 기저귀를 일찍 벗기고 한글을 읽어주고 숫자를 보여줬다. 엄마는 내게 가위질도 가르쳤다. 어디선가 가위질을 잘하면 머리가 좋아진단 말을 들은 것이다. 엄마에게 조기교육이란 혼자 먹고 싸고 사는데 필요한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는 내가 가위질에 소질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밖에 나가 노는 것보다 방에서 가위질하는 걸 더 좋아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인형이 그려진 종이 한 장과 가위를 주면 오래도록 엄마를 찾지 않고 혼자 놀았다. 그날도 살림하고 같이 사글세 사는 옆집 아줌마와 수다 떨고 한참만에 방에 들어왔을 것이다. 구석에 얌전히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갈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종이인형을 오리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내 손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오백 원짜리 지폐를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내가 한 말은 "여기 할아비 있어."였다 한다. 맞다. 오백 원에는 이순신 장군이 계셨다.
"야물딱지게도 오려 놨드라. 너무 잘 오려서 할 말이 없더라."
엄마가 준 종이인형을 다 오린 나는 서랍을 열어 오백 원 지폐 한 장을 찾았다. 거기에는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다. 종이인형이라 생각하고 심혈을 기울여 이순신 장군을 오렸다. 내가 오린 이순신 장군은 원래 계시던 자리로 돌아가셨다. 엄마가 조심조심 테이프를 잘라 붙였다. 나의 현란한 가위질과 엄마의 꼼꼼한 땜빵질이 세상에 하나뿐인 오백 원짜리 지폐를 탄생시켰다. 길이길이 보전했다면 좋았을텐데 엄마는 그 길로 나를 데리고 가게에 갔다. 주인아저씨에게 보이며 내 행적을 고발하고 여차저차하여 모양이 이 꼴이 됐는데 '그래도 쓸 수 있죠?'라고 물었다.
그 일이 내 인생 최초의 돈 사고였다. 모두 가난해서 가난한 줄 모르던 시절을 지나 중학생 때 친구 집에 있던 이층침대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지던 그날 이래 나는 오랫동안 가난을 자각하며 살았다. 스스로 돈을 벌 수 있게 되면 나아질 줄 알았는데 돈은 늘 얼마만큼 부족하고 내게 낯가렸다. 벌기 시작하며 오히려 돈 사고는 더 많이 일어났다. 지폐를 오렸던 일만큼 기발하지도 재밌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
오리기 종이 한 장은 이십 원이고 오백 원이면 같은 것을 스물다섯 장이나 살 수 있다는 셈 따위는 하지 못해야 가능했던 일. 뭘 모르던 시절의 이야기가 그리운 건 왠지 거기 어디쯤 반짝거리는 느낌 때문이다. 어쩌면 엄마가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지난 시간은 오래되어 떠올리면 꿈 같을 때도 있는데 내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사람이고 싶었는지 떠올리면 언제나 먼 시간의 나로 돌아간다. 잊힌 게 무엇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기억해내는 행위만으로도 발견했다는 착각이 든다. 그 시절에만 존재하는 순수함 때문일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짐작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