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미 소설 <여기 우리 마주>를 읽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50페이지 단편이었다. 그 해 봄을 이야기하는 소설을 마주할 줄 몰랐는데 마주하고 나니 몹시 초조해지는 한편 자꾸 흔들렸다.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는 시간들이 내 뒷덜미를 잡아채어 그때로 질질 끌고 들어갔다. 2020년 봄. 마스크를 쓰기 시작하던 해 그리고 엄마가 떠난 해였다.
'여기 우리 마주'의 주인공은 9년 동안 집에서 캔들공방을 운영했다. '혼수로 장만한 그릇세트'를 치우고 그 자리에 캔들용기를 채웠다. 딸의 장난감을 넣었던 수납장 한 칸에 스포이트와 작은 몰드를 넣고 저녁에 먹을 생선을 조리며 집에서 사람들에게 캔들 만드는 방법을 가르쳤다.
소설을 읽으며 나는 문장에 대고 자꾸 내 이야기를 해댔다. 주인공 이미라 씨가 땀 흘리며 밥 할 때 남편이 선풍기는 틀어줘도 밥을 대신할 생각은 안 하더란 말에 내 남편과 똑같네 하고 일할 때 살림하는 여자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기를 바랐다는 대목에서도 공감했다. 상가 계약을 했다는 말에 당시 나를 포함해 생계를 위협받은 자영업자들을 떠올리고 '그녀 넷'의 첫 수업을 했다는 대목에서는 '나는 그때 장례식장에 있었어요.'라고 조그맣게 되뇌고 한참 멈췄다.
그가 탈홈공방을 계획한 건 2020년이었다. 소설 속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새경플라자 304호에 공방문을 연 2월. 소설 밖에 있던 나는 고단했다. 예정된 학교 개학이 미뤄지며 운영하는 교습소가 2주간 문을 닫았다. 하루에 몇 번씩 날아오는 교육청 공지, 수업은 언제부터 하나요. 해도 괜찮을까요 문의하는 엄마들, 학원은 감염예방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반복해 보내던 문자들, 학교가 쉬는데 학원은 왜 수업을 하나 , 피시방은 영업금지인데 학원은 왜 아닌가 인터넷 뉴스 안에서 싸우는 사람들을 매일 들여다봤다.
휴원이 결정된 첫 주엔 정신이 없었다. 아이들이 수업하러 오지 않는 학원에 매일 출근해 교재를 준비했다. 프린트하고 비닐에 포장해 아이들 집 우편함을 돌았다. 소속되어 있는 원장 모임은 화상회의로 대체됐다. 화상회의는 처음이었고 대부분 그랬다. 작은 규모의 교습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상대적으로 큰 학원들은 대처가 빨라 화상수업으로 전환한 곳도 있다고 했다. 누구는 몇 달 혹은 최소 일 년은 이런 사태가 이어질 거라고 예측했다. 위기에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소리와 함께 아무 데도 가지 말라는 조언이 이어졌다. 원장이 놀러 갔다 감염이라도 되면 동선이 추적되어 나쁜 소문이 돌기 쉽다는 이유였다.
어떻게 변화해야 도태되지 않을까. 짧은 문장 속에 웅크린 두 개의 단어가 낯설었다. 도태와 변화의 정확한 뜻을 알 수 없어 불안했다. 돈을 못 벌고 적게 벌면 도태인 걸까. 인강을 병행해야 변화인 걸까. 서점가엔 발 빠르게 팬데믹 시대 살아남는 법에 관한 책이 나오고 유명한 강사들은 유튜브에 비대면 시대 돈 버는 법 썸네일을 걸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랬다. 이전과 이후의 세상은 구분되고 이제 이전은 잊어야 한다는 듯 잊으라는 듯 말했다. 조언들은 결정적으로 굴고 시끄러웠다. 거리 두기를 시작한 거리는 조용했다. 나는 느리고 미련이 많았다.
3월에 비해 4월은 상황이 나았다. 확진자 수가 한 자리로 줄고 마스크 구입을 위해 약국 앞에 길게 늘어선 줄도 사라졌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못했다
학원 수업은 다시 시작됐지만 수강생 중 절반만 돌아왔다. 나는 마스크를 쓰고 수업했다. 소설 속 이미라 씨도 마스크를 쓰고 캔들 수업을 했다. '그녀들의 첫 수업이 2020년 4월 22일이었던 걸 기억하는 건 여자들 중에 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63쪽) 내가 그 대목에서 멈춰 선 건 엄마가 4월 21일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코로나는 노약자들에게 치명적이었고 그 때문에 가족을 잃은 사람이 많았다. 사망자 수가 늘어날수록 우리는 두려워하고 참담했다. 엄마가 죽었을 때 검안의가 코로나 검사를 했다. 감염되었다면 장례식장에 갈 수 없다고 말했다. 엄마는 음성이었고 장례식장에 갔다. 코로나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장례식장도 갈 수 없었다.
소설 속 이미라 씨가 갔던 선별소를 나는 9월에 갔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기 하루 전 인 29일 화요일. 퇴근을 십분 쯤 앞두고 보건소에서 연락이 왔다. 전전날인 일요일 딸이 염색을 하러 학원 옆 미용실에 갔고 잠시 들렀는데 그때 옆에 한 사람이 마스크를 쓰고 앉아 있었다.
"같이 계셨던 분이 오늘 확진을 받으셨어요. 내일 보건소에 나와 검사받으세요."
"엄마 그분 우리 아파트에 안 산다던데. 해운대에 산다고 했어. 여기 시댁이 있어서 왔대. 아파서 병원 다니느라 파마를 몇 달 만에 한다고 말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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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해운대구 홈페이지에 들어가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나와 15분 밀접했던 그를 찾아봤다. 29일 확진자 명단과 동선을 확인했다. 금요일 해운대구 00 병원에 다녀간 사람들이 월요일 화요일 여러 명 확진됐다. 나와 접촉한 그는 월요일에 확진된 사람과 그전 주 금요일이나 토요일 같은 시간 병원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는 감염된 사실을 모른 채 일요일 우리 아파트에 있는 시댁을 방문하고 오랜만에 미용실에 들러 파마를 했다. 그중 나와는 15분 딸과는 30분 접촉했다. 월요일에 검사받고 화요일 양성으로 판정되어 0000번째 확진자가 됐다.
선별 진료소에 가기를 기다리며 잠들기 어려웠던 그 밤 나와 한때 밀접했던 그 사람은 집에 있을까 병원에 있을까 궁금했다. 증상이 심할까 가벼울까. 양성이 나오고 동선을 밝힐 때 미용실에 갔던 이야기를 하며 딸과 나를 떠올렸을 텐데 그는 어쩔 수 없다 생각했을까 아니면 미안했을까. 추석이 끝나고 미용실 원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놀라셨죠. 미안해요." 우리는 그때 그런 것들이 미안했다. 곤란했다. 스쳐서 미안해요. 같이 있어서 미안해요. 입 벌려 말해서 미안해요. 밥 먹으러 나가서 머리 하러 가서 미안해요.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요. 원장님 음성이라 다행이에요. 저도 딸도 괜찮아요."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바이러스로 증명된 현실은 슬프지만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 그해 우릴 난처하게 만들고 힘들게 한 이야기와 감동시킨 사연들은 모두 연결과 상관있었다. 특히 사회적 약자들이 소외되지 않도록 돌본 손길들, 피로와 위험 속에서 수고한 의료진들을 통해 우리는 서로에게 바이러스를 옮기는 동시에 서로를 돌보는 존재라는 걸 확인했다.
2020년을 지나온 사람들은 잊지 못할 자신만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욕심내기 시작한 순간부터 어떻게 고립되어 갔는지 외로웠던 봄에 대한 얘기를 각자 지녔을 것이다. 당연하게 누리던 일상을 잃었을 때 당혹감을 떠올리면 잊고 지내던 가치의 고마움이 따라온다. 우린 때론 쉽게 잊는다. 후회와 위기와 고립 속에서 '여기 우리 마주'하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 기억하고 증언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