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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Nov 25. 2021

최후의 99인





2008년 설 연휴를 2주 앞둔 1월이었다. 장이 갑자기 서울에 다녀온다고 했을 때 급한 출장이 잡힌 줄 알았다. 다음 날 올라온 '알리안츠생명 파업' 기사를 보고서야 진짜 이유를 알게 됐다. 회사가 일방적으로 도입한 성과급제에 반발해 노조가 47년 만에 첫 파업에 들어갔다고 기사에 적혀 있었다.

"파업 맞아. 오늘 저녁에 부산 내려가려고 했는데 하루나 이틀 더 있어야 될 것 같아. 글쎄, 모르겠지만 설 전엔 끝나지 않을까. 파업 인원이 지점장만 200명인데 회사가 생각이 있으면 빨리 협의하겠지." 

이틀 후 내려온다던 장은 2주가 지나도 오지 않았다. 장은 파업 현장에서 노조원들과 합동 제사를 올리고 떡국을 먹었다.     


장의 첫 직장은 '제일생명'이었다. 2006년 제일생명이 알리안츠 기업에 인수됐을 때 직원들은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를 막기 위해 임금협상을 양보했다. 장은 알리안츠가 노동자를 우대하는 독일 기업이고 기업윤리를 강조하는 회사라며 이 시기만 지나면 근로환경이 나아질 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2007년 12월 회사는 노조와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성과급제를 도입했다. 의도는 명백했다. 직원 간 차등을 격화시켜 구조조정과 정리해고 순서를 밟을 계획이었다. 알리안츠는 독일에선 하지 못하는 일을 한국에서는 저질렀다. 장은 회사가 독일 노조는 무서워하고 한국 노조는 무시한다며 분노했다. 나는 노동자의 권리가 기업이 내세우는 윤리로 지켜지는게 아니라 노동자의 강한 힘이 기업윤리를 세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험업계 최초 대규모 파업이란 기사가 연일 올라왔다. 참여 인원이 1000명을 넘어가며 업무가 마비됐지만 회사는 합의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지점장 노조 가입은 불법이라며 파업에 참여한 지점장들을 업무방해죄로 고소했다. 빠르면 일주일 늦어도 한 달 안에 끝날 줄 알았던 파업은 두 달째로 접어들었다. 예상보다 길어지자 회사로 복귀하는 지점장이 늘어났다. 200명이던 지점장 수는 130명으로 줄어들었다. 회사는 용역을 고용하고 경찰을 불렀다. 용역들은 집회를 방해하고 몸싸움을 걸고 주말을 틈타 노조가 설치한 천막을 부쉈다. 새벽 3시 천막을 찾기 위해 용역 사무실에 찾아가고 경찰 진압을 피해 컨테이너 위까지 올라갔단 말을 들었을 땐 파업이 전쟁처럼 느껴졌다.     


나는 살면서 장이 파업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못했다. 그런 건 자동차나 중공업 회사에서만 하는 줄 알았다. 한다 해도 며칠 출근하지 않고 집회 몇 번이면 끝날 일로 생각했다. 한 달이 넘어서자 파업은 현실로 다가왔다. 당장 1월부터 월급이 들어오지 않았고 장은 길거리에서 지냈다. 파업은 생계를 걸고 생활을 포기하고 안전을 내놓는 일이었다. 장은 현장에서 봄을 맞았다. 파업이 3개월을 넘어선 4월 말, 회사는 파업 지점장 120명 전원을 해고했다. 장은 내가 놀랄까 걱정했지만 나는 해고 통지서를 받고 오히려 전투력이 상승했다. 밤낮없이 부려 먹을 때는 언제고 해결은커녕 해고부터 하는 회사 태도가 어처구니없었다.     

 

사실 나는 뭘 그렇게까지 회사랑 싸우나 하는 맘이 있었다. 그깟 회사 관두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여기 아니면 어디 가서 밥 못 먹겠냐며 너무 애쓰지 말고 사표 쓰란 말도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회사가 하는 짓과 언론의 행태를 보니 그냥 나와선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파업을 배가 불러서 하는 짓이라 욕했다. 언론은 월급 더 받으려는 수작으로 왜곡했다. 회사는 고객을 인질로 삼았다며 몰아붙였다. 기업과 같이 성장하자 허울 좋게 말할 땐 언제고 법원에 고소하고 멋대로 해고했다. 노동자와 기업의 관계가 철저하게 계급이란 사실을 실감했다. 부당함을 외면하며 떠나는 건 오히려 쉬웠다. 하지만 그것은 불공정하게 타협하는 것만큼 비겁한 행동이었다. 나는 장에게 끝까지 싸워 꼭 이기라고 말했다. 그만둬도 복직하고 그만두자 했다. 장은 나와도 내 발로 나올 것이라 약속했다.     


회사는 해고 통지서를 보내고도 모자라 전화까지 걸어 가족을 회유했다. 영업 단장은 지금이라도 복귀하면 책임지고 복직시켜 줄 테니 장을 설득하라 부추겼다. 나는 콧방귀를 뀌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파업에 참여하라 강권했다. 몇 달을 길거리에서 먹고 자면서도 장이 가장 힘들어했던 건 사람이었다. 알리안츠는 한국 철수 운운하며 직원들끼리 적대시켰다. 장은 친하게 지내던 동료가 출근길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않을 때 상처받았다. 회사의 압박과 가족을 이유로 돌아간 사람들을 이해했지만 원망했다. 파업이 5개월로 접어들었을 때 지점장 200명 중 99명이 남았다. 사람으로 상처받고 사람으로 버티는 시간이었다. 장은 서로를 의지하며 끝까지 함께한 동료를 '최후의 99인'이라 불렀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기 전날인 9월 12일, 장은 239일간 파업을 마치고 돌아왔다. 노조는 성과급제 지급 격차 완화, 해고 지점장 전원 복직, 파업 참가자 인사상 불이익 금지, 임금 인상 5% 인상 등을 회사와 합의하고 파업을 마무리했다. 주류 언론에서는 성과급제를 완전히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노조의 패배라 보도했다. 장이 돌아온 날, 집에서 작은 파티를 했다. 해고 통지서는 가보로 남기자며 웃었다. 다치지 않아 다행이고 끝까지 싸워 자랑스럽다 말했다. "집에 오니 좋지?" 하는데 갑자기 장이 울었다. 참을 수 없다는 듯 눈물을 흘리고 울음소리를 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말곤 장이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잘 싸우고 왔는데 왜 울어. 고생했어." 

장은 스스로 위로하듯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고 회고하듯 눈을 오래 감았다 떴다.

"원한만큼 얻진 못했지만, 그래, 그래도 최선을 다했으니까. 처음엔 무조건 이길 수 있다 확신했는데, 너무 강하더라. 치사하더라. 더럽더라. 진짜 우린 아무것도 아니더라. 등 돌려 떠나는 사람들 보는 것도 너무 괴롭고. 나중엔 다 몰라도 애들한테 부끄럽지 말자는 생각만 들고."

나는 같이 울었지만 장이 겪은 고통과 상처를 온전히 헤아릴 수 없었다.     


2008년 9월 23일 법원은 회사가 노조와 지점장을 상대로 고소한 업무방해죄에 대해 모두 무죄를 판결했다. 이후 2009년 8월 12일 항소심에서도 파업이 합법이고 정당 쟁의라는 대법원 판결이 내려졌다. 장은 복직했다. 파업하는 동안 받지 못한 임금도 일부 돌려받았다. 하지만 파업에 끝까지 동참한 지점장과 먼저 돌아온 지점장들 사이 존재하는 껄끄러운 골은 쉽게 메워지지 않았다. 회사는 복귀한 지점장과 복직한 지점장을 분리했다. 장은 6년간 부산에 있지 못하고 울산, 통영, 밀양 등에서 근무했다. 중국 안방그룹이 알리안츠 생명을 인수하기 직전인 2016년, 장은 복직 후 8년 총 24년간의 회사 생활을 정리하고 희망퇴직했다. 장은 '나와도 내 발로 나올 것'이라 했던 자신의 약속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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