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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닮녀 Sep 27. 2022

햇볕과 바람과 달과 왈츠를

『어느 우울한 날 마이클이 찾아왔다』-나에게 마이클이란?

"당신도 산후 우울증 같은 거 느낀 적 있어?"

금쪽같은 내 새끼를 보던 남편이 내뱉은 말이었다. 하아. 말을 주워 담을 수만 있다면 한 자 한 자 고이 담아 다시 그 입으로 밀어 넣고 싶었다. 신랑이 나의 우울증을 모를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 사실을 태연스럽게 물어보는 말을 들으니 신랑이 왠지 모르게 야속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우울이라는 감정은 특별한 게 아니다. 누구나 겪을 수 있고, 누구나 느낄 수 있고, 누구나 마주할 수 있는 감정이다. 그렇기에 또 누구나 벗어날 수도 있는 훌훌 털어버릴 수도 있는 감정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산후우울증이라고 단정 짓기는 좀 그렇지만 나도 사랑스러운 두 아이를 낳고 온전히 24시간을 함께 하던 순간이 우울감에 젖어들었던 시간이었다. 



남들 다 가는 대학이라지만, 등록금 내고 4년 동안 공부하고, 비싼 아카데미를 다니며 취업을 하기 위해 준비하고, 어려운 입사시험을 치르며 살아왔다. 그런 노력들이 매일 음식을 잘게 다져 휘휘 저어주거나, 누군가의 분뇨를 깔끔하게 처리하는 일에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 나를 무의미한 사람으로 느끼게 했다. 꿈 많던 꿈 먹던 소녀가 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매일매일이 똑같은 하루에서 살고 있었다. 



나는 마치 창문이 굳게 닫힌 온실 속의 화초 같았다. 안전한 장소에서 자라는 화초이지만 시들어 죽지는 않을 테지만 잎을 열어 숨 쉬게 하는 따뜻한 햇볕을 직접 받을 수 없었고, 아픔을 흘려보낼 바람을 맞을 수 없었고, 생각과 마음을 자라게 하는 차가운 달빛을 받을 수 없었다. 



그림책 『어느 우울한 날 마이클이 찾아왔다』에는 우울한 달보씨에게 잡상 공룡으로 보이는 마이클이 찾아온다. 커다란 카세트테이프를 들고. 그러고는 다짜고짜 춤을 춘다. 달보씨는 그런 공룡에게 관심 없는 척 하지만 들썩들썩 까딱까딱 움직이던 몸을 리듬에 맡기고 공룡과 함께 춤을 춘다. 달보씨에게 우울의 감정에서 벗어나 함께 하고 싶다고 느끼게 한 것은 공룡의 다정한 물음이고, 신나는 춤사위이고, 함께한 순간이었다. 나에게 마이클 같은 존재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우울감에 갇혀 있던 때에서 세월이 흘러 아이가 커서 기관에 가게 되었다. 24시간 중에서 나는 아이의 엄마가 아닌 단 몇 시간만큼은 나로서 살게 되었다. 물론 아이가 기관에 간 동안에도 엄마로서의 일을 많이 처리해야 했지만, 그럼에도 잠깐은 굳게 걸어 잠근 창문을 활짝 열 수 있었다. 때때로 햇볕에 손을 내밀고, 바람에 코를 들이대고 달빛을 맛보기 위해 입을 벌렸다. 햇볕과 바람, 달빛은 나를 우울하다는 감정에서 벗어나게 해 준 다정하면서도 흥이 많은 마이클 같은 존재였다. 그렇게 마이클과 들썩들썩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우울의 감정은 나를 뜸하게 찾아왔다. 



이제는 데면데면 해 져버린 우울이란 감정이 그래도 가끔 내 마음에 노크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우울과 친해지기 전에 마이클에게 호출을 한다. 햇볕과 바람과 달에게 나와 함께 하자고. 고개를 들어 나무 사이로 비치는 눈부신 빛을 느끼고, 코 평수를 잔뜩 늘려 바람을 머금는다. 밤이 되면 달과 눈을 맞추고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달에게 얼른 나타나라고 텔레파시를 보낸다.



아, 오늘은 햇볕과 바람과 달과 왈츠를 추고 싶어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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