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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닮녀 Oct 29. 2022

화성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

계획형 인간 둘이 만나 계획하지 않으면 웬만해서 움직이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 오늘의 계획은 시댁의 결혼식 참석, 며느리로서 하루를 사는 것이었다. 생각보다 일찍 끝이 난 며느리 역할에 그냥 집에 들어가려던 찰나, 날씨가 너무 좋았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그늘은 서늘하고 햇볕은 따뜻한 날씨는 계획형 인간을 즉흥형 인간으로 변신시켰다.



장난스럽게 꺼낸 '화성행궁 야간개장'은 현실이 되었다. 웬만해선 새벽에 다니고, 오후의 어스름은 집에서 즐기는 걸 좋아하는 계획형 가족은 오후 5시, 화성으로 향했다. 2년 전, 코로나로 인해 갈 곳 없던 설날에, 명절의 기운을 느끼고자 방문했던 곳. 그 고즈넉한 풍경을 떠올리며 도착한 화성행궁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레이저 불빛이 화려하게 하늘을 가로지르고, 북적북적한 인파는 밤의 열기를 더욱 후끈하게 만들었다.


그랬기에.... 주차장은 만원이었다. 계획형 인간이 겁도없이 잠깐 즉흥형이 되었던 걸 뼈저리게 후회하며 2,30분가량 기다려 주차를 할 수 있었다. 하마터면 부부싸움이라도 날 뻔했지만, 아이들이 연신 '나오길 잘했다'를 외치며 밤의 운치에 감탄해 주었기에 별 탈없이 넘어갔다. 입장권을 발권하여 들어간 화성행궁은 다시 하루 즈음은 즉흥형이 되어도 괜찮다고 느낄 만큼 아름다웠다. 화려한 조명이 아닌 은은한 등불로 이곳저곳을 수놓은 모습이 낮의 경치와는 또 다른 매력을 뿜고 있었다.



아이들은 커다란 헬륨가스 풍선을 만지작 거리며 하늘로 날아갈 것 같다며 깔깔거리며 웃었고,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색 토끼 조명은 인증샷을 안 찍으려야 안 찍을 수 없게 만들었다. 행궁 안 봉수당에서는 레이저 쇼가 열리고 있었다. 레이저 쇼를 미리 검색해서 오지 않았는데, 갑작스레 만나 더욱 반가웠다. 이런 맛으로 즉흥형 여행을 하는구나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할 만큼 멋진 쇼였다. 웅장한 사운드는 몰입도를 높여 우리 손을 잡고 이끌어주었고, 색색의 레이저는 기와 끝에 매달려 옛 것과 새로운 것의 어우러짐을 느끼게 했다.


뒷마당으로 이어진 산길에는 청사초롱이 길을 밝히고 있었다. 소나무로 둘러싸인 이러타할 조명이 없는 곳을 청사초롱의 불빛을 따라 걷는 것은 하마터면 엄청 무서울 뻔했으나, 많은 사람들이 밀려 다니는 바람에 무섭지는 않았다. 인파 때문에 고즈넉함을 느낄  없는게 아쉬웠지만, 문득 이 사람들 모두가 좀비가 되어 산을 오르는 것 같은 상상에 재미있었다. 핼러윈 분위기를 고궁에서 느끼다니. 넷플릭스를 너무 많이 봤구나 생각하면서도 아이들과 좀비 흉내를 내며 사진도 찍었다. 언덕 산책을 마치고 내려와 어두운 행궁을 천천히 느끼다 밖으로 나왔다.



개인적으로 화성의 낮과 밤 중 어느 쪽이 더 아름답냐고 묻는다면 낮의 아름다움을 더 예찬하고 싶다. 정조의 큰 꿈과 어머니를 향한 깊은 효심이 느껴지는 부분들을 훨씬 더 잘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수원 화성 전체 성곽을 둘러보기에도 어두운 밤보다는 낮이 좋다. 장안문을 지나 방화수류정까지 걷다 보면 현대의 건물과 그 속에서 여전히 굳건한 모습으로 서 있는 성곽이 서로 어우러져 멋스럽다. 때로는 과거의 연결고리가 되어 조선시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그럼에도 밤은 그 자체로 낭만적이었다. 미세 먼지 덕에 뿌옇게 보이는 달이, 오늘 밤 그 달이 구름에 가려지면 여우가 변신하여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것 만 같은 느낌이 들어 더 매혹적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되돌아보니 화성의 낮은 밤보다 아름답다 할 수도 없고, 화성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 할 수도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화성의 낮도 밤도 모두 아름답다는 것을.







) 화성행궁 야간개장에 대해 조금 안내를 드리자면


+화성행궁 야간개장은 2022년 10월 31일까지입니다. 단, 이틀밖에 남지 않았답니다. 얼른 서두르시길!


+주차장은 어디나 만원입니다. 저는 아이들이 있어서 화성행궁 주차장에 20분가량 기다려서 주차했습니다. 성인들만 가신다면 조금 떨어진 팔달구청 주차장이나 선경도서관 쪽을 추천드립니다.


+화성행궁 안에는 화장실이 없습니다. 행궁 들어가기 전 미술관 앞에 화장실이 있습니다. 비교적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으니 꼭 미리 화장실을 다녀오신 후 행궁으로 입장하셔요.


+수원에 왔으면 통닭거리에 가야겠죠? 줄을 길게 늘어서 있는 모습에 지레 겁먹고 그냥 갈까 생각했는데요, 생각보다 테이블 회전이 빨랐습니다. 저는 진미 통닭으로 갔는데요. 옛날 통닭과 후라이드를 시켰습니다. 음, 맛있습니다. 죽기 전에 또 가고 싶을 만큼은 아니지만 수원 왔으면 한번쯤은 먹어볼 만한 맛이었습니다. 개인적인 픽은 후라이드가 더 맛나더라고요. 생맥을 곁들이는 것도 잊지 마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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