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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닮녀 Nov 28. 2022

크레파스처럼


크레파스처럼 살고 싶다.


손에 쥐면 묻어나는 기름 냄새.


부러지지 않는 단단함.


빙글빙글 곡선을 그릴 때의 부드러움.


차가운 물에는 자신을 내어주지 않지만


뜨거운 불에는 녹아 스며드는




크레파스처럼 살고 싶다.





 


크레파스가 가지런히 담긴 통 뚜껑을 열면 풍기는 그 특유의 기름 냄새가 좋다. 가만히 머물러 있는 삶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 연료를 태우는 냄새 같아서 좋다. 크레파스를 쥐었을 때 묻어나는 기름 냄새가 살에 밴 땀냄새와 어우러질 때 삶을 잘 살려고 애쓰는 중인 것 같아 기특한 마음이 든다. 매일매일 내가 가진 연료를 모두 태워 저 멀리까지 달려보고 싶다. 종착역으로 가는 길이 멀고 험하겠지만, 도착할지 못할지는 미지수지만, 달리는 내내 크레파스의 기름 냄새가 묻어나면 좋겠다.



크레파스는 쉬이 부러지지 않는다. 색연필은 조금만 힘을 실어도 톡 하고 부러진다. 사인펜은 살짝 힘을 주면 앞이 뭉그러지고 갈라져  제 색을 발현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하나, 크레파스는 부러지지 않는다. 스스로의 몸이 닳아 사라져 버릴지언정 부러지지 않는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모나고 딱딱하고 곧아서 부러지고 갈라지기보다는 둥글고 부드럽게 자신만의 단단함을 가지고 살고 싶다. 나의 마음이 모두 닳아 없어진다 하더라도.



아이스링크 위에서는 스케이트 날을 들어 콕콕 집으며 아장아장 걷는 초보 스케이터지만, 내 인생 링크장에서는 크레파스처럼 부드럽게 나아가면 좋겠다. 빨간 크레파스를 들고 하얀 스케치북에 빙글빙글 그릴 때처럼 부드럽고 매끄럽게 살고 싶다. 너무 미끄러워서 때로는 엉덩방아를 찧을 때도 있겠지만 다시 일어나면 되니까. 다시 크레파스를 쥐면 되니까 괜찮다.



미술 기법을 이용하여 작품을 만들 때 알았다. 크레파스는 기름으로 이루어져 물과는 섞이지 않는다는 것을. 뜨거운 불을 가하면 녹는다는 사실을.

차가운 물에는 자신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그 모습을 닮고 싶다. 차가운 사람, 무례한 경우에 흔들리고 싶지 않다. 동요하며 살고 싶지 않다. 그리 많이 아파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았으면 한다. 크레파스처럼 나를 내어주고 싶지 않다. 반대로 뜨거운 불에는 녹아 형태를 변형하는 크레파스처럼 뜨거운 사랑을 한 사람, 대상, 장소 등에는 나를 내어주고 그것에 고이 스며들어 하나가 되고 싶다. 그 속의 일부가 되어 함께 있고 싶다.




크레파스처럼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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