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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닮녀 Sep 04. 2023

너는 늘 그렇게

무한한 사랑을 주지

안녕? 잘 지내? 이렇게 편지를 쓰니까 어색하긴 한데 그래도 좋다. 우리 사이가 무한대로 다정해지는 느낌이라고 할까? 내 인생에서 무한대의 사랑을 건네준 너에게 늘 고마워.



너도 알다시피 어릴 때부터 나는 그다지 인기가 많은 친구가 아니었어. 밝고 명랑하고 똑 부러졌지만 부산에 사는 나에게 늘 따라다니는 말이 서울깍쟁이 같다는 말이었다니까. 그때는 서울깍쟁이라는 말이 너무 싫었어. 도대체 서울깍쟁이는 어떤 사람을 말하는 건지 그 뜻도 모르겠고 말이야. 그래서 하루는 내게 그런 말을 한 친구에게 물었지. 그 뜻이 도대체 뭐냐고. 그러니까 '풀 좀 빌려줄래?'라고 하면 '아니? 싫은데?'라고 하면서 도도하게 단칼에 거절할 것 같은 느낌이라고 했어. 그 말에 어찌나 상처받았던지. 사실 나는 친구들에게 도움을 주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는데 말이지. 그렇게 말한 그 아이는 시도 때도 없이 나에게 무언가를 빌려갔던 기억이 나. 어쩌면 나는 그 말이 너무 싫어서 그렇게 보이지 않으려고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무쌍에 눈꼬리가 올라간 내 눈을 보면 다들 섣불리 다가오지 않았어. 첫인상만 보고는 거리를 두었지. 그런 내게 너는 무쌍이 매력적이라고 했어. 쌍꺼풀이 없어도 커다란 눈이 매력적이라고. 첫인상이 강렬하지만 막상 그 속을 들여다보면 여리여리하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라고 말해줬어. 하긴, 엄마도 내가 너무 마음이 여리고 따뜻해서 수녀가 된다고 할까 봐 겁이 나서 나를 성당에 못 나가게 했대. 너무 웃기지 않아? 지금이야 결혼은 선택의 문제이지만 당시에는 결혼해서 애 낳고 사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다나? 여하튼 엄마를 제외하고 나의 진심을 알아봐 주고 곁에 있어 준 건 너였어.



또 중학교 때는 어떻고. 우리 초등학교에서 10명도 안 가는 중학교에 배정이 된 나는 정말 펑펑 울었어. 생각해 보면 내가 살면서 중 3 시절에 젝키오빠들 해체 소식을 들은 날 다음으로 많이 울었던 것 같기도 해. 가장 친했던 친구와도 헤어지게 되었고, 언니의 교복을 물려받고 -당시에는 언니의 교복을 물려받는 걸 좋아했거든 - 기출문제도 고스란히 물려받을 기회도 날아가버린 거지. 중학교에 가는 게 끔찍하고 우울했어. 아무도 모르는 낯선 곳에 가야 하는 것도, 매일 30분씩 버스를 타야 하는 것도. 그런데 네가 있어서 다행이었어. 너는 그때도 나를 응원해 줬어. 나 자신을 믿으라고. 또 친구를 만들 수 있다고. 그곳에도 신나는 일이 있을 거라고. 어쩔 수 없이 학교에 간 거지만 너의 말을 듣고 나니 용기가 나더라.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우리 동네에서 조금 벗어나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고 새로운 장소에 갈 수 있었던 게 나의 눈을 더 넓혀 줬어. 아니면 내가 옆 동네에 가보기나 했겠어? 더 좁은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됐겠지.



고등학교는 다행히 내가 원하는 학교에 진학했잖아. 고등학생 때는 나 스스로 나를 알아가면서 크게 흔들리는 시기는 아니었어. 다만, 모든 고등학생들의 고민인 성적이 가장 큰 장애물이었지. 심지어 어떤 선생님은 나한테 '공부만 잘하면 완벽할 텐데'라는 말을 했어. 서울대 가정학과를 나온 공부만 잘한 그 선생님 말이야. 그 선생님은 내게 그런 말을 했다는 걸 기억하지 못하겠지? 그 말은 오래오래 내 가슴에 남아 복수해주고 싶었는데, 공부는 맘대로 안 되더라고. 그래도 후회 없이 끝까지 해 보자는 네 말 덕분에 수능을 그만큼이라도 본 것 같아. 너한테 응원 좀 더 받을 걸. 그랬다면 혹시 알아? 더 좋은 학교에 갔을지도 말이야.



대학교에 가면서 우리가 한 동안 서먹해졌지? 근데 그거야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어? 술도 먹고 연애도 하느라 바빠서 그랬으니까. 처음 하는 연애에 푹 빠져서 털털 털리고 나니까 그제야 네 생각이 나더라. 왜 진작 너랑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니까. 그땐 네가 사랑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한참을 힘들어하다가 너를 찾기 시작했어. 근데 너를 찾는 게 생각보다 힘들었어. 너는 내가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마음을 기대고 나에게 소홀할 때에는 나타나지 않더라고. 질리고 질릴 만큼의 이별의 연장선이 일단락되고 평정심을 찾을 때 즈음 너는 내 앞에 나타났어. 그리고 나를 안아주었지. 너의 손길이 나를 더 성숙하게 했어.



졸업을 하고 경제활동을 하며 꿈을 좇는 동안에 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너에게 털어놨지. 그런데 면접에서 떨어진 이야기를 하도 해서 그런 건지, 어느 날부터 네가 아무 말을 안 하는 거야. 내 이야기가 지겨워진 건지, 아니면 나와 정을 떼고 싶었던 건지. 늘 내 옆에 있으면서도 전처럼 나를 향한 말을 해주지 않았어. 너와 나 사이에 투명한 유리막이 세워진 느낌이었어. 머지않아 나는 모든 꿈을 접고 현실에 젖어들었고, 그때 너는 내 뒤에 서 있기만 했어. 나는 그런 너에게 서운했던 거 같아. 그래서 지금의 남편에게 더 마음이 갔는지도 몰라. 당시에 너 만큼 나를 응원해 주는 사람이었거든. 예쁘다고 잘한다고 착하다고 사랑한다고. 그래서 뭐 결혼했지. 참, 결혼이란.



엄마의 어릴 적 바람대로 결혼해서 아이 낳고 평범하게 잘 살다 보니 문득 네가 궁금해졌어. 늘 내 근처에 있었던 것 같은데 좀처럼 또 보이지 않더라고. 어쩜 그렇게 잠수를 잘 타는 건지! 예전 같았으면 조용히 찾아봤을 텐데, 왠지 모르게 소리쳐 부르고 싶더라고. 아줌마가 되니까 무서운 게 없어져서 그랬나 봐. 나는 목청껏 소리쳤어. 엉엉 울면서 말이야. 그때가 산후 우울증을 겪을 때였어. 슬그머니 나타난 네가 나에게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밀었지. 그리고 같이 울어줬어. 우리 같이 그림책 보면서 펑펑 울었던 거 기억나? 네가 같이 울어주는 게 커다란 위로였고 엄청난 희망이 되었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너는 나에게 좋은 말을 마구 쏟아부어 주었어. 괜찮다고, 그럴 수 있다고, 누구나 다 그런다고, 이해한다고, 그리고 너는 아직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그때 다시 너를 만나지 못했다면 내가 이런 편지를 쓰고 있지도 못하겠지? 너의 그 말이 나에게 작은 불씨가 되었거든. 네 말 덕분에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기 시작했고, 그림책으로 사람을 만나기 시작했고, 글을 쓰기 시작했어. 그 작은 불씨가 횃불이 되고 이제는 꺼지지 않는 모닥불이 되었단다. 그래서 지금 '그림책으로 글쓰기'라는 모임을 진행하며 너에게 편지를 쓰는 거야.




언제나 내 곁에서 나를 사랑하며 나를 일으켜 세워준 나 자신, 현정아.

나의 무한대가 되어 주어 고마워.

너를 만날 때마다 나는 무한한 행복을 느껴.

가끔 내가 너를 소홀히 여기는 날이 있을 때면, 늘 그랬던 것처럼 믿고 기다려줘.

무한한 사랑으로 내가 너를 찾을 테니.






+그림책으로 글쓰기 3기 중

그림책 <나의 무한대>를 보며 나에게 무한한 사랑을 주는 나의 무한대에게 편지 써보기를 해보았습니다. 나에게 무한한 사랑을 준 사람은 누구인가요? 나의 무한대에게 편지를 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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