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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닮녀 Nov 30. 2023

지옥이불

있을 법한 지어낸 이야기

"잔돈은 괜찮아요"

택시아저씨에게 오천 원짜리를 내밀고는 최대한 또박또박 정중하게 말했다. 다리에 힘을 주고 눈에는 세 겹 쌍꺼풀을 만들어 얹어놓고는 최대한 일자로 걸었다. 한적한 주택가에 위치한 4층 건물, 1층 현관 앞에 뚜벅뚜벅 걸어 다다랐을 때 택시는 홀연히 떠났다. 국희는 그제야 긴장이 조금 풀렸다. 두리번두리번 고개를 돌려 길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걸쭉하고도 뜻뜨미지근한 덩어리를 연거푸 목구멍으로 탈출시켰다. 우웩.



하아, 술 버리면 천벌 받는다고들 했지만 입에 넣었다가 몇 시간 뒤에 나오면 그 정성이 갸륵해서라도 천벌 아닌 백 벌 정도 받을 거라고들 했다. 그래서 미련하게도 꾸욱꾸욱 들이부었던 것이다. 알코올은 가요차트 저리가라 할 만큼 역주행 했다. 숨통이 트일 만큼 속이 비워지자 대차게 현관을 열고는 4층으로 향했다. 왜 하필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의 4층이 집인 것인가?라는 철학적인 질문이 숨을 턱턱 막히게 했다. 도저히 답을 구할 수 없는 물음표가 꼬리를  때 즈음 드르륵 열쇠를 넣고 문을 당겼다. 다행히 식구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하긴, 하루 이틀 늦는 것도 아니고, 또 천벌대신 백 벌을 받기 위해 애썼겠거니 생각하는지, 다들 깊은 꿈나라에 빠져있었다. 때로는 '드릉~'하는 코 고는 소리와 '잉~'하는 냉장고 소리가 앙상블이 되어 나의 등장을 맞아 줄 때면 한 없이 외로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오늘 같이 무릎이 계속 땅과 자석이 된 것 마냥 바닥으로 붙는 날에는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는 ASMR이었다.



국희는 자신의 방으로 살금살금 들어갔다. 대충 옷을 번져 던지고는 그대로 침대를 향했다. 술 마시기 딱 좋은 오월의 밤이었지만, 나는 청춘이라고 온 동네방네 광고하며 오월부터 반팔에 미니스커트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국희에게 밤공기는 무척이나 차가웠다. 얼어붙은 몸뚱아리를 녹히기 위해 이불속에 발부터 넣었다. 차가운 이불의 감촉이 찌릿 느껴져 하마터면 은근히 차오르던 취기가 달아날 뻔했지만, 이내 이불 안으로 얼굴까지 집어넣고는 농도 짙은 알코올 날숨을 가득 채웠다. 알코올 도수 마냥 23도의 따스함이 이불을  물들였다. 몸도 마음도 포근해지자 빙글빙글 세상이 돌기 시작했다. 국희는 어디론가 빨려 들어갔다. 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눈을 떠보니 국희는 무언가를 가득 채운 무거운 양동이를 양쪽 어깨에 매달아 짊어지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균형을 잃으면 휘청거리며 한쪽 양동이가 엎어질 듯 철썩철썩거렸고, 때문에 몸이 쏠리면서 우당탕 쿵탕 하기 딱 좋았다. 코가 바닥에 닿을 뻔했다가 고약한 냄새를 맡고는 얼굴을 들어 다시 중심을 잡았다. 온갖 더러운 오물이 지뢰처럼 깔린 밭을 뜨거운 물이 든 양동이를 짊어지고 건너가야 하는 지옥이었다. 설상가상 왼쪽 눈은 뿌옇게 보이는 것이 뻑뻑하고 따가워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오른쪽 눈만 겨우 뜨고 양동이를 쏟지 않게 오물을 피해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 1층 현관에서 알코올을 다시 역주행시키지 말았어야 했는데, 천벌 대신 백벌이 드디어 왔구나 하는 생각에 후회가 밀려왔다. 마구 차오르던 액체를 다시 집어넣었더라면 오물지옥에 오지 않았을 텐데, 무거운 양동이를 들지 않았을 텐데, 눈이 잘 보였을 텐데. 두려운 마음에 으앙 울음이 터져 나왔다. 소리 내어 우는 바람에 다시 비틀 넘어질 뻔한 찰나 겨우 중심을 잡고 서 있는데, 이번에는 차가운 비바람이 불어왔다. 서러움이 북받쳐 소리를 지르려는데 퍽퍽, 무언가가 옆구리를 과격했다. 이제 총공격을 시작하는구나 눈물이 눈앞을 가리는 찰나 국희의 시야에 무언가가 어른거렸다.



"야. 조용히 하고 일어나라고. 야. 정국희"

국희의 언니 육희였다. 육희의 오른손에는 분무기가, 왼손에는 먼지떨이가 들려있었다.

"야. 뭐 하냐? 술 먹었음 곱게 자라. 곱게. 아빠 일어나시기 전에 빨리 씻고 치워."

육희는 더러워서 건드리고 싶지 않다는 강력한 의지를 드러내며 먼지떨이 막대기로 국희의 옆구리를 꾹꾹 찔렀다. 국희는 오른쪽 눈만 떠서 상황을 파악했다. 양쪽 어깨에는 벗다만 윗옷이 어깨에 걸려 짓누르고 있었다. 벗으려고 애를 썼는지 손으로 긁어서 그랬는지 벌겋게 화가난 어깨였다. 방안에는 벗어던져 놓은 양말과 미니스커트, 그리고 먹다가 뚜껑을 닫지 않아 흘러넘친 생수통이 지뢰밭을 이루고 있었다. 다행히 지옥은 아니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몸을 일으키는 국희를 보며 육희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차고는 방을 나갔다. 열리는 방문 너머로 아빠의 드릉 소리가 다행히 들려왔다. 반가웠다. 여전히 왼쪽 눈은 뜨기가 어려운 상태, 오른쪽 눈에 의지해 오물아닌 허물들을 휘리릭 치웠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방안을 정리하고는 잠옷을 갖춰 입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거울 앞으로 가서 눈을 살펴보았다. 국희의 왼쪽 눈에는 빼다만 렌즈가 들어있었다.

'그래서 그랬구나. 히히'

국희는 조용히 중얼거리며 렌즈를 뺐다. 뻑뻑하긴 했지만 이제 눈은 뜰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듯했다. 편안해진 얼굴로 다시 이불속에 몸을 넣었다. 지옥 같은 건 없다고, 백벌이니 천벌이니 그런 건 없다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국희는 이제 진짜 꿀잠을 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 창문 밖으로 엄마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또 우리 집 앞에 토를 해 놓고 갔어요. 어휴 진짜, 당장 씨씨티비를 달아서 범인을 잡아야 해요. 아주 천벌을 받을 놈들이라니까. 지옥에나 떨어져라."



으악!

이불속 세상이 다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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