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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닮녀 Dec 06. 2023

사랑한다면 찌질하게

너도나도 겪어봤을 지어낸 이야기

종점에 서 있는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에는 아무도 없었다. G는 제일 뒤로 가 앉았다.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폰을 꺼냈다. 폴더폰을 열어젖혔다. 버튼을 꾹꾹 눌러 메시지 함을 열었다. 추운 날씨에 꽁꽁 얼어붙은 손가락이 부자연스러웠지만 버튼을 연신 눌러가며 문자를 썼다. 

"나 지금 집 앞에 가는 중이야. 3시에....."

G는 얼어붙은 손가락으로 애써 썼던 문자를 지웠다. 다시 무어라 쓰려고 하다가 이내 폴더폰을 접고 다시 코트 주머니 속으로 넣어버렸다. 문자를 남겨 도착시간을 알려주면 부러 그 사이에 도망가버릴 것 같아서, 보내지 않기로 했다.



한참을 달렸다. 바람이 쌩쌩 부는 거리에 목도리를 칭칭 두르고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걷는 사람들 52명,  가로등 328개 즈음 지나쳤을 때, 약국이 시야에 들어왔다.

'약국을 지나고 벨을 눌러. 다음 정류장에서 내리면 돼'

길 찾기에 익숙하지 않은 나에게 다정하게 알려주던 K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귓가에 맴도는 목소리에 G의 눈에는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버스에서 괜한 구경거리가 되지 않으려고 눈물을 꾹 참고 하차벨을 눌렀다. 약국 모퉁이를 돌아 다음 정류장에 내렸다. 익숙한 얼굴이 반가운 손짓을 하며 G를 맞아주던 버스 정류장은 낯선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시 휴대폰을 열어 메시지함을 열었다. 다시 닫았다. 다시 열었다. 다시 닫고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최근 통화목록에는 오로지 하나의 번호만 있었다. 익숙한 컬러링이 흘러나왔다. 

'한동안 많이 힘들겠지. 예전처럼 우리 다시 만날까. 말하고 싶은데 말하고 싶은데 그댄 지금 어디에'

역시나 K는 받지 않았다. 다만 한참 뒤 낯선 여자가 급한 용무가 있다면 삐- 소리 이후에 메시지를 남기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여자 목소리에 김이 샜다. 종료버튼을 누르고 메시지함을 열어 버튼을 눌렀다. 기다리겠다고. 헤어지는 게 아쉬워 서로의 체온을 붙들고 늘어졌던 다정하고 익숙한 그 버스 정류장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G는 K의 집을 알아두지 않은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하는 수 없이 익숙하고도 낯선 그곳에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만약 K가 집에 있다면 그래서 G를 조금이라도 기다렸다면, 컬러링 속 가사처럼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나올 것이고, 만약 집에 없다면 택시를 타지 않는 이상 이 길을 반드시 거쳐야 하니까. 싫더라도 마주치겠지. 어떤 식으로도 끝이 나겠지 생각했다. G는 오늘은 반드시 K를 만나 세상 찌질함을 담아 질척거려 볼 작정이었다. 오늘따라 하늘은 하늘색도 파란색도 그렇다고 회색도 아닌 희끄무레하고 누르스름하게 뒤섞인 색이었다. 그야말로 G의 마음 같았다. 맘도 날도 얄궂기 그지없었다.



형언할 수 없는 희끄무레 죽죽한 하늘이 어느덧 까만 하늘로 덮여가고 있었다. 때마침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손 잡고 다닐 때 눈이 내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땐 그렇게도 안 오던 눈이 소복소복 내리기 시작했다. K를 만나면 초라해 보이지 않으려고 한 화장과 드라이로 띄워놓은 머리에 눈이 내려앉았다. 차갑고 시렸다. 코끝이 빨개지고 발가락이 얼어붙어 낯설다 못해 날 선 공간이 되어 버린 버스 정류장에서 G는 계속 기다렸다. 한 시간 즘 지나자 눈은 잦아들었지만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마음을 베듯 파고 들어왔다. 다시 전화를 걸까 했지만, 더 찌질해지는 것 같아 참았다. 아무 연락이 없는 핸드폰을 보며 통신이 잘 되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기지국 표시가 끝까지 차 있었다. 전혀 이상이 없었다. 스팸문자는 속속들이 도착하고 있었으니. 



G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아까 그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역시나 메시지를 남기라고 했다. 화가 나 전화를 끊어버렸다. 반대편 정류장으로 가서 버스를 타고 가버리고 싶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얼어붙어 정말 바닥에 발이 붙어버린 것 마냥, 차마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았다. G는 하찮아지는 자신의 존재를 애써 붙잡으며 할 만큼 했다는 말로 마음을 토닥였다. 하지만 위로는 되지는 않았다. 성에 차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또다시 통화버튼을 눌렀다. 이번엔 여자가 전화를 받기 전에 끊어버렸다. 다시 통화 버튼을, 종료 버튼을, 통화 버튼을, 종료 버튼을, 60번가량 반복했다. 아무 연락도 없었다. 전화기가 꺼져 있지도 않았는데 답은 없었다.  



정말 찌질한 기분이었다. 며칠 전만 해도 죽고 못살더니 왜 그렇게 싫어졌을까 다 맞춰줄 수 있는데 하는 의문과 도대체 네까짓 게 뭔데 라는 불만이 서로에게 활을 겨누며 물어뜯었다. 하지만 불만은 이내 졌다. 손가락을 누르는 행위도 졌다. 그저 더 기다렸다. 버스 정류장의 정류장 팻말이 된 것 마냥 그 자리에서 기다렸다. 결국 막차시간이 다가오고, G는 발걸음을 돌렸다. 전화기에 대고 마구 욕하고 싶었지만 G는 그럴 수 없었다. 사랑했기에.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K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떤 날은 술에 취해 펑펑 눈물을 흘리며 곡소리를 했다. 여자 목소리가 싫었지만 찌질하게도 여자에게 메시지를 전해달라고 부탁도 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뭐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잘못했다고 이제 그만 돌아오라고 빌었다. 예전처럼 다시 만나자고. 도대체 어디에 있냐고 애원했다.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고

한없이 약자가 되어 눈물 흘리고

술에 취해 속도 마음도 토해내던 G의 모습은 

그야말로 찌질 중에 상 찌질이었다.


사랑은 그런 것.

앞뒤 재지 않고 한 없이 찌질해지는 것. 

찌질해서 자라나는 것. 

찌질해서 아름다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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