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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닮녀 Nov 30. 2023

묵직하고 따수운 겨울이불

오늘도 덮습니다

EP1.


"학교 가야지. 이제 그만 일어나"

"으음~"

신음소리만 내는 아들은 여전히 침대 위 이불에 폭 싸여있다.

"그 정도 잤으면 됐어. 이제 고만 일어나 세수해. 아침 먹고 학교 가야지."

미간에 주름을 잔뜩 그려 넣으며 아이에게 다가가 했던 이야기를 또 하기 시작한다. 커튼을 걷고 불을 켜고 이몸을 주무르고 볼을 꼬집어 보아도 아들은 여전히 꿈나라다. 다시 2절을 읊는다. 이제 그만 일어나 세수하고 아침 먹고 학교가라고 속사포로 쏟아내 보지만 뒹굴뒹굴만 할 뿐 일어날 기미가 없다. 질 수 없지. 3절을 시작하자 아들은 그제야 실눈을 뜨고 배시시 웃으며 나를 쳐다본다.

"엄마, 이리 와봐. 여기 잠깐 누워봐."

"..."

안돼!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해야 하는데, 3절과 4절 사이 여기 잠깐 누워보라는 아들의 애교섞인 내레이션에 꽁꽁 얼어붙어 뾰족하게 깎여 나가던 마음의 고드름이 스르르 녹는 중이다.

'아, 얘는 왜 이렇게 멘트가 따끈하지? 복슬복슬 털 담요 같으니라고.'

결국 오늘도 누워 버렸다. 토실토실 털 담요를 꼭 껴안고.






EP2.


"아니, 엄마. 이게 말이 돼? 오늘 체육 시간에 피구를 했는데, OOO이 여자들 보고는 던지지 말라는 거야. 여자들이 던지면 무조건 진다나? 근데 OOO이 던져가지고 상대편이 받아서 던지는 바람에 결국 걔가 졌거든. 그래놓고는 여자들 때문이라고. 아니 이게 말이 되냐고."

학교를 다녀오자마자 딸은 열변을 토했다.

"아, 그래? 게임...."

더 이상 대답을 하기도 전에 다음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리고 엄마, 이번 주에 뉴진스 새 앨범 나온대. 나 그거 사주면 안 돼? 이번 포카에 진짜 예쁜 버전이 있다고 애들이 보여줬는데 너무너무 꼭 갖고 싶더라고. 엄마도 뉴진스는 좋아하잖아. 근데 엄마 뉴진스 멤버 누구누구 있는지 알아?

"뉴진스 알지. 민지. 그리고 음...."

"엄마, 내가 몇 번이나 말해줬는데 그것도 몰라? 아니 엄마는 나이는 젊은데 왜 그런 걸 몰라. 엄마가 맨날 반주 먹으니까 기억력이 떨어져서 그렇잖아. 엄마 내가 초성힌트 줄게 ㅎㅇ은 누구야? 응? 근데 엄마 냉장고에 치즈 없어? 백화점에서 사 온 거 네모난 거 말이야. 치즈는 다 맛있지만 큐브 치즈가 나는 제일 맛있던데, 엄마는 어떤 치즈 좋아해? 엄마 어릴 때도 치즈 있었어? 아직도 ㅎㅇ누군지 몰라?"

정말이지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딸의 수다. 덕분에 내 귀는 뜨겁다.

방한 귀마개를 쓴 것보다 안 썼을 때 더 뜨겁다.

뜨거운데, 진짜 진짜 뜨거운데, 근데 달콤한 딸의 수다는 내 귀의 캔디.





EP3.


"푸~ 푸~"

진짜 신기하단 말이지. 분명히 입을 움직이지 않는데 남편에게서는 바람을 내뿜는 소리가 난다. 술만 먹고 오면 나는 신기명기 소리 재주. 근데 푸푸 할 때마다 뜨거운 입김에서 농도 짙은 알코올 내음이 풍겨온다. 침대 끝으로 몸을 살짝 밀어놓고 고개를 반대로 돌려놓고, 등을 돌린 상태로 누워 잠을 청한다.


머리만 기대어도 아니 머리를 기대지 않아도 어디서든 어떻게든 잘 자는 스타일이지만, 딱 하나 갖쳐져야 하는 조건이 있다. 발이 따뜻해야 한다는 것. 발이 차가우면 쉬이 잠에 빠져들지 않는다. 특히 겨울철이면 양말을 신고 이불을 덮고 한참을 예열해야 따스해진 발로 곤히 잠에 빠지는데, 요럴 땐 술 취한 남편 찬스.


평소 열이 많은 남편의 허벅지 즈음에 발바닥을 척 갖다 붙인다.

"으~ 으음"

본능적으로 살짝 피하는 듯 하지만 푸푸 증기를 내뿜을 정도로 취한 날에는 뜨거운 몸을 내게 마구 내어준다. 그다지 섹시하진 않지뜨끈해서 매력적인 구들장 같은 남편의 몸뚱이.

근데 구들장에 한번 빠지면 못 헤어 나온다는 사실. 그래서 뜨끈뜨끈한 사이로 같이 사는 중이다.


 




아들, 딸, 남편이 하는 말, 행동

그리고 존재 그 자체가

내게는 묵직하고 따스운 겨울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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