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닮녀 Dec 30. 2021

사라지는 것들 속 영원한 것들

『사라지는 것들』


띠링. 문자가 도착했다.


항상OO은행을 이용해주시는 고객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22년 1월 OO일 △△역 지점이 효율적인 영업점 운영을 위하여 인근 지점으로 통합되어 운영됨을 알려드립니다.


은행에서오는 그냥 그런 광고문자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거기서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다시 문자를 읽었다. △역 지점이 사라진다는 뜻이구나..... AI의 발달로 미래에 사라질 직업 중 하나로 꼽히는 은행원은 나의 옛 직업이다. 그리고 문자에 등장하는 △역 지점은 나의 첫 근무지.



비록 간절히 원해서 얻게된 직장은 아니었지만, 꿈을 위해 달리는게 아니라면 폼나게 돈이라도 벌어보자하며 큰 포부를 가지고 간 곳이었다. 은행 이전의 직장들은 대부분 계약직이나 프리랜서의 개념이었기에 이러타할 나만의 공간도 없었고, 그 흔한 명찰, 태그도 없었다. 명함조차도 내가 디자인하여 스스로 만들어 지니고 다녔다. 그런 나에게 은행은 특별했다. 창구 한쪽에 나의 이름이 떡하니 새겨져 있었다. 나를 나타내는 번호(사번)가 있었고, 나만의 컴퓨터가, 나만의 사물함이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무엇보다 나의 뭘 믿고 내어주는지 모를 권종 별 몇다발씩의 돈이 있었고, 오늘 하루도 돈을 실컷 만지게 해주는 신기한 곳이었다. 물론 단 몇일만에 그 돈을 만지는게 싫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커다란 금고에서 돈 덩이를 짐짝 옮기듯 무심히 대해본 경험은 재미있었다.


사실 △역 지점은 신입사원들 사이에서 절대 가서는 안되는 지점 베스트 오브 베스트에 들어가는 곳이었다. 은행의 인사이동에서 어떤 입김이 작용한다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퇴사했기에 당당히 말할 수 있다고!! 아니면 말고 뭐) 나는 당시에 이러타할 명품빽도 향기로운 입김도 없었다. 그곳에서 버티면 어딜가도 된다라는 악마의 지점에서 첫 근무를 시작했다. 과연 베스트는 남달랐다. 아침 9시가 되기 2분 전에 닫혀진 셔터를 올리면 거짓말을 조금 보태어 스무쌍은 넘는 발이 보인다. 또 시작이구나, 얼마나 다이나믹하고 흥미진진한 사건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셔터가 더 올라가 손님들의 얼굴을 비춘다. 비장한 눈빛으로 얼른 번호표를 누르라며 텔레파시를 보내는 손님들이 무섭다. 밀려드는 일을 처리하면서도 은행원의 본 업무를 게을리 할 순 없다. 온갖 실적을 푸쉬하는 알림이 계속해서 쏟아지고, 바쁜 와중에도 "카드 하나 하실래요? 하나만 해주세요"라고 천연덕스럽게 묻는 나를 발견한다. 미인계를 쓸 수 없음에 안타까와 하며 애(哀)인계라도 써본다. 최대한 슬프고 불쌍하고 힘든 척, 지금 생각해보면 그 발연기가 오히려 실적을 막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든다. 시장 근처 지점이라 꼬깃꼬깃 접은 돈들은 기계에서는 잘 세어지지도 않고, 덕분에 돈 계산은 늘 틀려 야금야금 나의 돈을 뺏어가기 일쑤였고, 기계는 하루가 멀다하고 고장나서 자동화기기 회사 아저씨와는 애인보다 자주 통화하는 사이가 된다. 그럼에도 빈 창구가 많은데도 꼭 나를 찾아오는 손님이 있는가하면, 덕분에 좋은 상품을 가입했다고 고맙다는 말을 하는 분, 또 친절히 응대해주어 기분이 좋다고 좋은하루 보내라는 예쁜말을 건네주시는 분들도 계셨다. 무엇보다 함께하는 동료 언니들이 이끌어주고 토닥여주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첫 지점에서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하고 휴직을 하며 결국에는 그곳을 떠나왔지만, 내가 일했던 어떤 곳보다 가장 기억이 많이 남는 공간이다.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서운했다. 지긋지긋하게 일하느라 들여다 보기도 싫은 곳이었는데, 막상 나의 추억이 담긴 곳이 더이상 볼 수 없는 곳이 된다고 생각하니 무언가 섭섭했다.



그림책 『사라지는 것들』

  

세상에는 사라지는 것들이 참 많다.



살다보면 많은 것들이 사라진다. 사람도 하물며 세상에 왔다가 한 줌의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데, 우리가 사는 동안 무언가가 바뀌고 변하고 사라지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작은 상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음악 소리도 저 멀리 흩어지고, 우울한 생각도, 낙엽잎, 머리카락 등 많은 것들은 사라진다. 있다가도 없어지고 있던 것도 바뀌는 것이 인생이다.


결국 모든 것은 지나가고, 변하거나 사라져.
하지만, 단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어.
그리고 그건 결코 사라지지 않을 거야. 영원히.



최첨단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오늘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것들이 사라져가는 인생을 살고 있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걸맞게 변모하기 위해 흩어지고 사라지는 세상.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나의 첫 직장의 공간은 비록 사리지지만, 다른 무언가가 들어서겠지만, 그 곳을 지날 때 나의 추억만은 영원히 있을 것이다. 그때의 추억들은 아무리 다른 것들이 새롭게 터를 잡고 들어와도 나의 마음 한켠에 자리잡고 내 인생의 자양분이 되어줄 것이다. 매일 시켜먹었던 야식의 달콤짭쪼롬했던 맛, 지점장님 커피잔을 씻으며 왜 이걸 여직원들만 하는가로 열변을 토했던 동료들과의 찰진 수다, 입덧으로 고생할 때 나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화장실 변기의 묵직함, 그리고 나의 첫 PC의 패스워드를 설정하던 설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나의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아온 추억과 온정은 영원히 함께 하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림책 덕분에.


아직 나의 추억의 공간이 사라지려면 약간의 유예기간이 남아있다.

그 사이에 한번 다녀와야겠다. 첫사랑은 추억속에 두는 게 좋다는 말이 있지만,

그래도 이제는 마주하지 못할 미운정 고운정이 듬뿍 담긴 그 공간을 눈에, 마음에 꼭꼭 담고싶다.

공간이 사라지더라도 마음 냉장고에서 가끔 꺼내어 먹을 수 있도록.

마지막 추억을 쌓으러 발걸음을 옮겨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 그걸로 병원가면 돈 버리는 거야. 그냥 자면 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