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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닮녀 Jan 08. 2022

내 안의 버들 도령을 찾아서

백희나 작가의 『연이와 버들 도령』

육아를 글로 배우던 시절이 있었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던 일. 한 번도 배워보지도 경험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아이를 안고 있는 나. 사람들은 품에 안긴 아이만 본다. 그리고 나에게 묻는다. 너무 예쁘지 않냐고. 너무 행복하지 않냐고. 나는 그저 웃는다. 나도 아이를 들여다본다. 새근새근 잠자는 아이는 참 예쁘다. 그럼에도 아이가 눈뜨고 숨 쉬고 있음이 참으로 감사함에도 늘 행복하지는 않았다. 때때로 화가 나고 지하 100층을 찾아가는 나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보듬어 보고자 육아서를 읽기 시작했다. 육아서가 추천해주는 여러 도서들을 돌려 읽으며 '그래 잘하고 있어. 네 탓이 아니야. 넌 충분해'라는 쓰담쓰담을 스스로에게 주고 있던 때에, 나의 가슴을 탁 막히게 하는 책 한 권을 만났다. 법륜 스님의 『엄마 수업』.


남편이 다혈질이어서 나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는 것은 내 마음에 그 상처를 담아 두고 있다는 얘기예요. 남편이 화를 내면 '내가 이해심이 부족했구나, 배려가 부족했구나'이렇게 알아차리고 참회하면 돼요. 그러면 나한테 상처가 안됩니다. (...... 중략) 우선 엄마가 말을 좀 줄이고, 남편이 뭐라고 하면 "네, 알겠습니다"라고만 대답하는 게 좋아요. 입을 다물라고 했다고 대답조차 안 하면 오히려 남편의 분노를 삽니다.
(p.90/ 『엄마 수업』, 법륜 지음/ 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궤변인가? 어떻게 나에게만 참회하라고 하는가? 순종적인 대답을 하는 게 못 배운 여자 같아서, 신여성보다는 구닥다리 사람인 것 같아서, 엄마라서 아내라서 그저 무조건 받아들이고 견뎌내라는 말 같아서, 나는 저 멀리 보이지 않는 곳으로 책을 치웠다. 어떤 반론을 하면 점차 내가 할 말이 없어질 것 같은 불안감에 그 책을 계속 읽으면 진짜 그렇게 행동할 것 같아 두려워 그냥 덮어버렸었다.


육아 10년 차. 어느덧 강산이 변할 만큼 세월이 흘렀다. 시간이 차곡차곡 쌓였다. 나름 '엄마', '아내' 좀 해본 사람이라는 훈장도 붙었다.( 아직 명함 내밀 정도는 안되지만;;;) 아이와 조금은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는 나만의 시야가 확보가 되니 이제야 나는 법륜 스님의 말을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된다. 저 사람은 왜 저럴까?라는 질문조차도 나에게 되물어야 한다. '나는 왜 그 사람을 저럴까라고 단정할까?'하고 물어야 한다. 부부 관계도 마찬가지다. 남편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나는 어떻게 대했는가, 왜 이상한 사람으로 바라보았는가를 짚어보아야 한다. 내가 진짜 남편에게 원하는 게 무엇인지, 하고 싶은 말이 뭔데 그렇게 화를 내는 건지 나 자신에게 질문을 해야 한다.


그렇게 나 셀프 질문을 던지고 나니 이제야 비로소 내가 보인다. 나에게 난 상처를 다른 누군가를 통해 치유하려고 했던 어리석은 나. 매몰차게 몰아쳤던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저 먼 어딘가로 날려가 내가 아닌 척 애써 다른 모습으로 전전긍긍했던 나. 그런 나를 보듬어 줄 사람은 나 밖에 없는데. 그때도 지금도 앞으로도 잘했고, 잘하고 있고, 잘 해낼 거라고 나를 다독일 사람은, 일으킬 사람은 나뿐이라는 걸 삼십 대의 끄트머리에서 알게 되었다. 다행히도.

백희나 작가의 따끈따끈한 신작, 무려 3년여의 시간을 담아 탄생한 『연이와 버들 도령』. 책 속에서는 보기만 해도 뭉클한 연이와 버들 도령의 사랑이 그려진다. 책장을 무심코 넘기다가 나는 두 사람이 참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연이의 얼굴과 클로즈업되는 장면을 보고 있으니 사랑하면 닮는다고 했지만, 사랑에 빠져 들자 말자 이렇게 닮을 쏘냐 생각을 했다.

아니무스

융이 제시한 원형의 한 요소로 여성의 무의식에 존재하는 남성적 성격 특성. 아니무스는 여성에 있어서 조상 대대로 남성에 관해서 경험한 모든 것의 침전물이다. 즉, 인간 정신 속에 전승된 남성적 요소로 여성에서의 아니무스는 생각, 의견, 판단으로 나타난다.



백희나 작가는 버들 도령을 연이의 '아니무스'로 설정했다. 옛이야기에는 없는 새로운 설정을 그림책에 입혔다. 그것도 특별한 심리학적 용어로 우리 내면을 들여다보게 한다. 그러고 보니 둘이 닮은 이유가, 둘을 똑같이 표현한 작가의 의도가 그려진다. 그림책 속 연이는 버들 도령이 차려주는 따뜻한 밥상을 먹고 힘을 낸다. 버들 도령이 챙겨주는 버들나무 상추 잎과 진달래를 받아 들고는 웃는다. 연이는 버들 도령 때문에 아니 덕분에 늙은 여인의 말만 듣던 나약한 자신의 틀을 깨고 몰래 나온다. 그리고는 자신의 다른 모습을 찾아간다. 막상 찾아간 그곳에서 뼈만 앙상한 자신을 맞닥뜨린다. 연이는 그런 나를 외면하지 않고, 슬픔에만 젖어 있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내가 가진 힘으로 살을 살리고, 피를 돌게 하고, 숨을 불어넣는다. 그렇게 연이는 틀을 깨고 자신을 만나며 생각과 의견이 담긴, 스스로 판단할 줄 아는 진정한 나로 완성된다.


연이와 버들 도령을 읽으며 나에게 살을, 피를, 숨을 불어넣을 수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음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조금 부족하더라도 나를 살리는 사람은 나이고, 나의 생각을 갖도록, 의견을 갖도록, 내 인생을 판단하고 나아가도록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라는 걸 알게 된다. 때로는 누군가 무심코, 또는 작정하고 던진 불씨에 시커멓게 타버린 나를 만날지도 모른다. 그럴 때 고이 품어 간직한 나만의 피살이, 살살이, 숨살이를 꺼내야겠다. 내 가슴속 예쁜 꽃들을 키워 본다.



오늘도 나는 나에게 집중하며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의 마음속 버들 도령이 대답해 주기를 바라며

정답은 아니더라도 해답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연이가 되어 버들 도령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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