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9시 영업 종료를 칼 같이 지키기 위해 짧은 시간 임팩트 있는 술자리를 가진 남편은 거하게 코를 골며 잠을 자고 있다. 새벽 5시 반, 알람이 울리고 냉장고에서 인공눈물 하나를 꺼내 큰 아이의 방으로 향한다. 아직 눈도 제대로 못 뜬 채로 정신줄을 겨우 부여잡고 아이의 눈에서 드림렌즈를 꺼내며 아이도 드림에서 꺼낸다. 나보다 더 열심히 미라클 모닝을 수행하며 자신의 할 일을 차곡차곡 채워가는 큰 아이.
아이에게 물 한잔 가져다주고는 거실로 가서 못다 갠 빨래를 정리한다. 밤에 잠들기 전 어질러 놓은 소파 위 책들도 차곡차곡 정리하고, 오늘 아침 메뉴는 무엇으로 할까 냉장고를 열고 잠깐 고민에 빠진다. 두부와 눈이 마주친 나는 '그래. 너로 결정했어'라고 외치며 녀석을 집어 든다. 스테인리스 팬에 두부가 붙지 않게 요리하려면 너무 차가운 식재료는 옳지 않기에 실온의 따뜻한 공기를 쏘여준다.
그리곤 노트북을 가져와 전원 버튼을 누른다. 어제 쓰다만 글을 다시 열어 이리 고치고 저리 고치고 다듬는다. 도대체 무슨 글을 쓰냐고 궁금해하는 가족들에게 절대 말해주지 않는 그 글들을 비밀스럽게 쓰고 고치고. 그러다 보니 여섯 시 반.
작은 아이를 깨우러 출동한다. 일찍 일어나는 건 싫지만, 누나가 해야 할 일을 끝내고 혼자 노는 건 더 배 아픈, 세상 단순한 아홉 살 남자아이는 그제야 눈을 비비며 일어나 포옥 하고 나에게 안긴다. 포옹으로 에너지를 충전하고는 오늘 할 일을 시작한다. 나는 다시 노트북 앞으로 돌아와 커서와의 눈싸움을, 단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는 눈싸움을 이어간다.
어느덧 시곗바늘은 7시 30분을 향해 가고, 부랴부랴 아침을 준비한다. 들기름 듬뿍 두른 스테인리스 프라이팬을 한참 달군 뒤, 키친타월로 꾹꾹 눌러 물기를 없앤 두부를 올려 지글지글 들기름 샤워를 시켜준다. 아이들 밥상을 대령하고 나니, 눈 비비며 일어나 옹달샘을 찾는 토끼? 가 아니라 곰탱이등장. 갑작스러운 소식을 전한다. 아버님의 시골 행으로 아픈 어머님이 오늘 혼자 계시니, 잠깐 다녀오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 얼마 전 대장 수술 후 코로나와 육아로 한 번도 뵙지 못했기에 선뜻 나 혼자 다녀올게 외친다. 아이들과 남편 점심을 챙겨 놓고, 설거지를 마무리 한 후, 진한 믹스커피 한잔을 벌컥벌컥 들이켠 다음, 차키를 챙긴다.
떠나기 전 남편은 '엄마 이야기할 사람 없어. 네가 많이 들어줘'라고 부탁을 한다. 그리고 알려준 한 가지 주의사항, 귀에 피딱지가 앉을지도 모른다는 것. 주의사항을 명심하며 차에 오른다. 먼저 마트로 향한다. 어머님께 들릴 작정이었다면 미리 반찬을 했을 텐데, 시간이 없는 관계로 소고기 몇 팩을 장바구니에 담는다. 수술 후 피를 많이 흘리셔서 그런지, 가끔 쓰러지신다는 이야기가 맘에 걸려 투뿔 한우로 넉넉히 챙긴다.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설정하고 40분 남짓 달린다. 오랜만에 홀로 드라이브라니 꿈이냐 생시냐! 고요하고 평안한 차 안의 시간을 즐기다보니 어느새 시댁에 도착한다. 딩동. 벨을 누르자 문이 열리고, 오직 홀로 서 있는 며느리를 보며 계속 뒤를 아련히 바라보는 어머님. 흠,, 아무래도 아들을 찾는 것 같지만 '오늘은 저 혼자 왔어요!'하고 활기차게 외친다. 밥 차려드리려고 왔다가 이것저것 얻어먹고 이것저것 양손 가득 챙겨서 다시 돌아온다. 이것저것에 정신팔린나는 주의사항을 깜빡! 귀에 피딱지가 앉았다. 효도의 피딱지.
다시 차에 올라 집 근처 서점으로 악셀페달을 밟는다. 대형 백화점 지하에 위치한 서점이라 주차장 들어가는 데에 온 힘이 다 빠진다. 차를 돌려? 말아? 마음이 갈팡질팡 왔다 갔다 하는 사이 서점 도착. 캬 ~역시 서점은 좋다! 비록 사람이 너무 많아서 책 향기의 쾌적함은 조금 떨어지지만, 책장을 넘기는 나의 손목 스냅은 부드럽고 활기차다. 택배 파업으로 인터넷 주문을 섣불리 할 수 없었던 나는 속속들이 책들을 찾아 담는다.
이제 집으로 향한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씻고, 빨래하고, 저녁밥에 돌입. 상추를 씻고 갓김치를 꺼내고, 청양고추 송송 잘라 대령. 고추장에 매실과 참기름 통깨를 넣어 양념을 한다. 냉동 차돌박이를 바싹 구워 가족들과 푸짐한 저녁 한상을 먹는다. 맛있는 고기반찬의 냉혹한 마지막은 설. 거. 지. 스팀샤워 한 바가지 뒤집어쓴 설거지가 끝이 나고, 딸기 가득 올려진 케이크를 디저트로 먹으며 잠시 입에도 맘에도 평화가 찾아온다.
곧 양치질을 끝낸 아이들이 책을 골라온다. <연이와 버들 도령>, <장수탕 선녀님> 그리고 <창가의 토토>와 한바탕 놀아본다. 그리고 굿 나이트 뽀뽀와 함께 자유시간이 찾아온다.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시작한 드라마 시청.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을 본방 사수하며 긴 하루의 끝에 찾아온 휴식에 잠깐 여유를 갖는다. 드라마가 끝나고 나니, 다시 아침에 하던 눈싸움에 아직도 미련이 남아 이렇게 브런치에 접속하여 하루를 되돌아보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