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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닮녀 Feb 19. 2022

앤과 다이애나처럼 우리... 다시 만날까?

사랑하는 나의 친구 H양에게 진실할 것을 엄숙하게 맹세합니다.

 요즘 온라인 독서모임으로 고전 읽기를 하고 있다. 어린 시절 나의 감수성이 무럭무럭 자라도록 충분한 영양분을 주었던 빨간 머리 앤과의 만남으로 시작했다. 같은 구절에 밑줄 긋지만, 다른 이야기를 하고, 다른 구절에 밑줄 긋지만 같은 이야기를 할 때도 있다. 함께 읽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느끼는 중이다. 단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앤에 빠져 사느라 브런치는 돌볼 틈이 없다는 것. 그래도 일주일에 두 편은 나와의 약속이기에 꾸역꾸역 뭐라도 써본다. 앤에 기대어 써본다.




"우린 서로 손을 잡아야 해. 그리고 흐르는 물 위에 있어야 해.
이 길이 흐르는 물이라고 상상하자. 내가 먼저 맹세할게.
난 해와 달이 없어지지 않는 한, 나의 가슴속 친구 다이애나 매리에게
 진실할 것을 엄숙하게 맹세한다.
 이제 내 이름을 넣고 네가 말해봐."
다이애나는 웃으며 그 '맹세'를 했고, 맹세를 하고 나서도 웃었다.
"넌 이상한 아이야, 앤. 네가 이상하다는 얘기는 전에 들었어.
하지만 틀림없이 널 무척 좋아하게 될 거야.




이애나와 앤이 첫 만남에서 이리도 거창하고도 아름다운 우정을 고백하는 장면.

막역한 친구를 만나고 싶다던 앤의 간절한 소원이 이루어지던 장면.

나의 친구가 떠올랐다.




 어린 시절, 아파트 분양 사기에 휘말린 부모님은 어쩔 수 없이 돈을 잃게 되었고 잠시 동안 두 칸짜리 방에 작은 부엌이 딸린, 연탄불을 피우는, 주인집 대문 옆으로 난 좁은 길 안쪽 집에 살았다. 나는 사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거의 없는데, 이상하리만큼 이 집에서의 기억은 생생하다. 연탄불을 바꾸던 엄마의 모습과 난방이 안 되는 부엌에서 요리하던 엄마, 기다랗게 이어진 골목길 등 이 초라한 공간은 오래도록 박제되어있다.


 불편한 기억 때문이었을까? 그 좁고 춥고 어두운 공간에서 살던 우리는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새로 지은 번듯한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이사 가는 곳은 같은 동네에 있었지만 1동에서 3동으로 이사를 해야 했기에 다니는 학교를 옮겨야 했다. 이제 부모가 되고 보니 어쩔 수 없이 더 좋은 환경을 위해 전학을 택한 부모님의 마음은 십분 이해가 되지만, 당시 전학이라는 엄청난 새로운 모험을 시작해야 하는 나는 힘들었다. 아닌 척했지만 맘을 졸이며 떨었다. 내 방이 생기고, 내 책상과 내 침대가 생기는 건 설레었지만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는 것은 설레지 않고 두려웠다.


 그런 나의 걱정과는 달리 나는 운이 좋았다.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꼭 표현하고 싶다. 정말 좋은 선생님을 만났고, 그 선생님이 지정해 준 자리에 앉아 한 친구와 친해졌다. 그녀는 처음 온 나를 반겨주고, 따뜻하고 상냥하게 대해 주었다. 다이애나처럼. 거기에 공부도 잘하고 글씨를 잘 써서 인기도 많았다. 집으로 가는 방향이 같았던 우리는, 앤과 다이애나가 '연인의 오솔길'을 걷듯이, 학교 뒷문 담벼락을 배경 삼아 '회색빛 우정길'을 걸었다. 앤과 다이애나가 한가한 황야에서 깨진 접시로 소꿉놀이를 할 때, 우리는 친구 집 창고에 숨어 생라면을 부셔 먹고 좋아하는 노래를 함께 듣곤 했다.


 어쩌면 앤이 말한 막역한 사이를 만난 느낌이라고나 할까? 앤과 다이애나처럼 손을 잡고 맹세를 하고 고백을 하지는 않았지만, 함께 있는 시간과 함께 즐기는 것들과 함께 쌓아가는 추억들이 우리를 막역한 사이로 만들어 주었다.


 그런 막역한 사이였지만, 우리는 점점 멀어졌다. 다른 중학교로 진학을 하게 되며 주말에만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친구가 더 멀리 이사 가는 바람에, 중학교 3학년이 되자 아주 가끔 만날 수 있었다. 사실, 그때 당시 내가 젝키에 미쳐있기도 했고.^^;;; 그럼에도 연락을 끊지 않고, 서로에게 편지로 맘을 터 놓고, 우정의 끈을 이어오던 찰나, 결정적으로 멀어진 계기가 있었다.


 나보다 훨씬 공부를 잘했던 그녀는 집안 사정이 그리 넉넉하지 않아 인문계 고등학교가 아니라 실업계 고등학교로 진학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친구에게 다시 생각해보라는 설득도 했지만 친구의 결심은 완강했다. 집안 사정까지 속속들이 간섭할 수 없었기에, 친구의 뜻을 응원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전환점을 계기로 우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다른 환경에서 다른 관심사와 목표가 생긴 우리는, 점점 같은 길을 걸어도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색하고 불편한 시간이 싫어서 뜸한 사이가 되었고, 수능을 치르고 친구는 취업을 하며 고향을 떠났다. 그 이후로 연락이 끊겼다.



비록 지금 우리는 만날 수도 없고, 서로 어떻게 지내는지도 모른다. 생사여부도 모르고 살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해와 달이 없어지지 않고, 우리 곁에 있기에 나는 엄숙하게 그 친구를 그리워하고 있다. 사실, 너무 흔한 이름의 나를, 그 친구가 찾을 방법은 없을 것이다. 어린 시절 살던 곳에서 우리 집도 이사를 했고, 집 전화번호도 없어졌으니....

  하지만 조금은 특별한 성을 가진 그 친구를 내가 열심히 찾으면 만날 지도 모른다. 럼에도 선뜻 나서 지지 않는 이유는...  내 마음이 조금 더 그 친구와 같은 곳을 바라보게 될 때, 찾고 싶기 때문이다. 섣불리 나섰다가 또 다른 곳을 향하는 서로의 시선에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되면 엄숙했던 우리의 추억들이 모두 흐지부지 될 것 같아서.... 너무 미루다 보면 같은 곳을 바라보지도, 같은 길을 걷지 못할 수도 있지만, 조금만 더 핑계를 대며, 시간의 끝을 붙잡고, 마음속으로만 만날 날을 그려본다.



"다시 만나서 너무나 기뻐. 다이애나."


"나도야, 앤."


그림책, 『앤과 다이애나』의 한 장면. 슬픈 사건으로 헤어졌던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이 아름답다. 언젠가 나도 그 친구와 이렇게 재회하고 싶다. 두 손을 꼭 붙잡고 우리가 걸었던 '회색빛 우정길'을 다시 걸어보고 싶다. 너와 나의 색깔을 모두 품고 있던, 그 회색빛 길을 다시 걸으며, 엄숙하고 진실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고 싶다.



나의 막역한 친구 OO아, 잘 있지?

다이애나와 앤의 끝없는 대화처럼, 우리도 만나서 사는 이야기 해보자. 네가 좋아했던 '우윳빛 커튼 나풀거릴 때 잠이든 그대 뺨에 키스를' 부르던 노유민(NRG) 이야기도 하자. 노유민이 결혼할 때 울었는지 안 울었는지 궁금해. 너 엄청 좋아했는데. 그리고 라면 부셔먹을 때 아직도 스낵면만 먹어? 이상하게 나도 부셔먹을 땐 스낵면이 생각나. 어린 시절의 너와의 추억 덕분에 스낵면이 제일 맛있게 느껴져... 아, 끓여 먹을 땐 무슨 라면을 먹는지 추천해 주라. 아빠, 엄마는 건강하셔? 중국 영화를 좋아하시던 너희 아빠, 비디오 가게에 테이프 빌리러 같이 가던 기억이 나. 언제나 웃으며 친딸처럼 대해 주시던 너희 엄마, 너랑 너무너무 닮아서 아마 지금쯤 너는 너희 엄마처럼 변했겠지? 나는 궁금해.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지냈는지, 가끔 내 생각은 했는지, 사랑하는 사람은 얼마나 만났는지.... 언젠가 내가 먼저 꼭 찾을게. 그때까지 기다려줘. 해와 달이 사라질 때까지. 너무 늦게 찾아서 나를 이상한 아이라고 한데도 너는 나를 좋아하게 될 거야. 그때도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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