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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과 Jun 20. 2023

그 많던 시간은 다 어디로 갔을까

어느 퇴사자의 일상 실험 보고서

"나는 늘 게으른 사람에게 어려운 일을 맡길 것이다. 왜냐면 그는 가장 쉬운 방법을 찾아낼 것이기 때문이다."는 빌 게이츠가 한 말이다. 빌 게이츠가 정말 이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디선가 이 짤을 발견한 나는 재빨리 주머니에 넣었고 자주 꺼내봤다. 그때마다 빌게이츠는 환하게 웃으며, 응 괜찮아. 너는 결국 가장 쉬운 방법을 찾아낼 거잖아. 그렇지? 하며 나를 위로했다. 내가 빌이 원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직장생활 1년이면 충분했다. 나는 그냥 게으른 사람이다. 어제도 오늘도.


 그의 악마 같은 속삭임이 다시 들리기 시작한 건 퇴사를 결심한 직후였다. 알레르기 약을 복용한 탓인지 나는 부쩍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래 내가 쉬운 방법을 찾아내는 사람이 못 된 이유는... 여기가 마이크로소프트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는 늘 매뉴얼대로 하길 원하지. 아 심지어 이들은 그런 마인드를 추구하는 것조차 치를 떤다. 요령 피우지 마! 라며 언제나 개미처럼 일하는 것을 원할 뿐. 9시에 출근해 하루종일 시키는 일만 하며 오늘은 왜 이렇게 시간이 안 가는 거야? 되뇌는 삶은 이제 그만두자.

 회사원으로서 안온한 일상이 영 재미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나처럼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나누며 점심을 보내고 싶어 하는 미혼 남성들과 함께 밖으로 나가 제육볶음을 먹었다) 시간이 아까운 건 사실이었다. 차라리 하루 종일 집에서 영화만 보는 게 내 인생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래 결국 나는 가장 쉬운 길을 찾아낼 거니까! 그렇게 기세가 좋았던 나는 별다른 계획 없이 회사를 나왔고 지금은 무계획 원조맛집 기생충 송강호 선생님만큼이나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도대체 그 많은 시간은 다 어디로 간 걸까.


 말이 나온 김에 어떻게 된 영문인지 분석해 보기로 했다. 자영업자인 나는 이제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놓친 일정을 귀띔해 줄 동료도 빠진 회의자료를 체크하며 나를 소처럼 부릴 상사도 이제 더 이상 없다. 가령 어제는 글쓰기 모임 마감을 앞두고 빌게이츠 짤을 찾고 있었는데 (너무 오래돼서 정확한 문장이 생각나지 않았다...) 갑자기 내일이면 벌써 창엽이 결혼식이라는 사실이 생각났다. 나는 그의 몇 안 되는 미혼 남성 친구로서 축의금 받는 일을 부탁받았는데 축의금 받는 사람이 넥타이를 매야하는 건지 아닌 건지 통 생각나지 않았다. 그때 번개같이 드라마 <나의 아저씨> 1화에서 형제들이 축의금을 빼돌리는 장면이 머리에 스쳤다. 거기서 송새벽이 넥타이를 했었나? 넷플릭스 클릭. 그리고 5시간이 흘렀고 졸린 눈을 비비며 나의 아저씨 6화가 플레이 중인 창을 닫았을 땐 시계가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몇 년에 걸쳐 이 드라마를 대략 3번째 보고 있다. 처음엔 외력이니 내력이니 하는 이선균의 명대사에 입을 벌리며 봤고 두 번째는 여기 나오는 여러 아저씨들의 자조 섞인 농담에 매료되더니 어제는 이상하게 고두심 선생님의 "이 고학력 빙신들, 나이 오십도 안 돼서 집구석에서 밥 처먹을 줄 누가 알았어! 아 공부는 뭐 하려 했냐?" 이런 대사가 더 마음을 후볐다. 일종의 내적 성장이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일을 처리하는 방식에는 아무런 성장이 없다는 것에 있다. 가령 나는 어릴 적 이순신의 일생을 조사하는 숙제가 하다가 갑자기 거북이의 수명이 궁금해져 두산백과사전을 열었다가 밤새 유관순의 행적을 쫓고 막상 이순신은 하나도 정리가 안 돼 당일 자습시간에나 겨우 친구의 숙제를 베껴 써내는 흔한 ADHD 병색의 초등학생이었는데 패턴이 지금과 무섭도록 똑같다. 다행히 결혼식은 오후 5시였다. 신에게는 아직 12시간이 더 남아 있습니다. 나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8시에 눈을 떴다. 창문의 블라인드를 치는 걸 깜박했기 때문이다. 이런 아침은 굉장히 뿌듯하다. 보통 직장인들은 일련의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친 뒤 9시부터 업무를 시작할 텐데 난 원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나만의 건설적인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편안한 마음으로 머리맡의 핸드폰을 찾아 인스타그램을 열었다.

 이 안엔 정말 많은 게 있다. 며칠 전만 해도 힘들다며 퇴사를 부르짖던 친구가 2주 동안 휴가를 간다며 올린 유럽 풍경 (휴가 2주씩 쓸 수 있는 회사였구나), 스티븐 잡스가 죽기 전에 직원들에게 남긴 말 (나도 애플에 재직 중인 느낌), 거북목 교정은 모르겠지만 일단 한번 일주일만 써보라고 1년째 나를 꼬시는 엣프터 목베개 (이건 진짜 몇 개나 팔렸을까), 보고 또 봐도 재밌는 무한도전 레전드 짤 (할 말 없음), 자꾸 넘어지는 팬더 그리고 풀밭에서 아기 오리와 뛰어 댕기는 강아지 (원래 둘이 친한가...?) 질투, 동기부여, 쇼핑, 유머, 힐링까지 이곳은 세상을 보는 창이자 감정의 백화점이다. 나는 누워서 세계를 여행한다. 아침부터 한 시간이나 여행을 했더니 조금 노곤하다. 하지만 이제 일어나야 한다. 그냥 일어나기는 아까우니 10분만 누워서 건설적인 생각을 해보려 한다. 이렇게 인스타 릴스를 넘겨보는 행위는 사실 우리가 어릴 적 텔레비전 리모컨을 쥐고 채널을 돌려대던 행위와 별반 다를 게 없지 않나? 도파민 중독, 잘 모르겠다. 이건 그냥 오래전부터 반복되 온 인간의 자연스런 여가활동일 뿐이다. 나는 대강 읽고 말았던 스티븐 잡스의 유언을 찾아 다시 스크롤을 위로 올리다가 나도 모르게 스르르.


 주말 일정을 소화하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을 때는 일요일 밤 12시였다. 나는 게으르다. 짧은 사례를 통해 시간이 어떻게 사라지는지 확인했다. 나는 이제 지난 30년간 반복된 임상실험을 중단하기로 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마음 한 구석에 품고 다니던 게으른 천재에 대한 썰에 대한 폐기다. 파쇄기에 넣어서 완전히 없애 버릴 것이다.

 대신 새로운 신조를 찾았다. 이것만은~ 작전이다. (이것도 인터넷에서 봤다) 어떤 익명의 부지런한 분이 세운 원칙인데 워낙 일이 바쁘다 보니 놓치는 것이 많아 일상이 무너진다고 했다. 그래서 아무리 바빠도 이것만은~이라는 원칙을 세운 것이다. 아무리 바빠도 주 2회 운동은, 아무리 바빠도 주말에 강아지와 산책을. 간단하다. 나도 해보기로 했다. 가장 쉽고 가장 좋아하는 일부터 정하는 게 좋겠다. 아무리 바빠도 아침은 꼭 먹을 것이다. 이왕이면 제시간에 식탁에 앉아 아주 많이 먹을 것이다. 탄수화물과 단백질을 잘 맞추고 채소도 먹을 것이다. 커피는 꼭 직접 내려서 마실 것이고 다 먹고 난 뒤엔 영양제도 종류별로 먹을 것이다. 왠지 그래야만 여전히 회사에서 제육볶음을 먹으며 안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을 전 직장 동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근황을 전할 수 있을 것 같다.



    


인터넷에서 직장인인데 새벽 4시에 일어나 5시에 출근해 웹소설을 쓴다는 이야기를 읽었다. 당연히 아침도 먹고 커피도 내려마실 것 같다. 갑자기 다시 초조해진다. 인터넷을 끊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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