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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과 Oct 22. 2023

이상하고 아름다운 식물일기

을지가드닝클럽

을지가드닝클럽을 만든 건 작년 11월경이었다. 을지로 한복판에서 감자를 심고 수확한 것이 조금씩 알려지며 매거진에 소개되기도 했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다. (differ - 혼자보다 함께) 하지만 공간을 꽉 채우고 있던 감자가 사라지고 남은 자리는 헛헛했다. 감자보다 느리지만 지속가능한 것들을 키우고 싶었다.


5명으로 시작한 을가클에는 지금 10명이 조금 안 되는 사람이 있다. 마늘, 양파로 시작한 을가클 마당엔 지금 오이, 고추, 참외, 배추, 감자, 메밀 등의 작물과 바질, 레몬밤, 로즈마리, 고수 같은 허브류의 식물이 함께 자라고 있다. 사람과 식물 모두 조금씩 같으면서 조금씩 다르다. 우리는 매주 한 번 꼴로 돌아가며 을지로 작업실 콥랩을 방문해 물을 주고 마당을 정돈한다. 그리고 비치된 일지에 기록을 남긴다. 한 달에 한 번은 다같이 모여 책을 읽고 각자의 생각을 나누는 독서모임을 진행하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는 식물을 매개로 한 곳에 모여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고 때로는 여행을 떠나기도 하는 그룹으로 1년의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왜 이곳에 모여있는가? 그리고 앞으로 이 그룹의 미래는 무엇인가? 모일 때마다 습관적으로 이야기하던 이 주제는 단순 취미생활이다부터 시작해 바질 페스토를 팔아 상업화를 이루자는 것까지 크고 작은 다양한한 아이디어로 빙빙 돌다가 이제는 함께 해서 재밌으면 굳이 이유가 있어야 되나? 같은 근본적인 깨달음으로 귀결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것도 일종의 성장일지.

 


매 월 식물과 관련된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



내 경우 공간 활용이라는 집착도 있었지만 결국은 사람에 대한 고픔이었던 것 같다. 을지로에 십분의일을 만들고 직장생활을 병행하던 나는 아침저녁으로 매일같이 사람을 만났다. 수많은 관계 속에서 허덕이던 나는 인간 자체에 대한 스트레스를 자주 토로했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식물들에게 둘러 쌓이는 상상을 자주 했다. 그러다 십분의일이 사실상 해체되고 연이어 퇴사까지 하면서 모처럼 후련한 기분이 들었지만 얼마 안 가 금세 공허함이 찾아왔다. 작업실을 빽빽이 채우던 감자가 한순간에 사라지고 텅 빈 공간만 남았을 때 느꼈던 허무함처럼 사람 때문에 온갖 고생을 했지만 그래도 결국 새로운 울타리를 찾고 싶었던 것 같다.


걸으면서도 포인트를 챙겨야 하는 전형적인 현대인인 나는 사실상 수익활동이 없는 을가클 활동이 그리 만만하지는 않다. (물론 지금도 을가클에서 따온 바질을 샌드위치와 함께 뜯어먹으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어제는 몇몇 멤버들과 함께 경주에 내려가 경주국제마라톤에 참가하고 경주의 각종 로컬 식당과 지역 특산물을 맛보며 잔뜩 돈을 쓰고 왔다. 확실히 가져가는 것보다는 소비하는 모임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회사를 다닐 때처럼 잠시라도 쉬지 않고 무언가를 짜내야 한다는 마음을 잠시 내려둔다면 많은 것들을 볼 수 있다. 1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우리는 이제 어딜 가든 식물을 뜯어보고 때로는 그들의 이름을 알아본다. 전에는 그냥 푸르른 자연에 불과했던 거시적 세계가 이제 수많은 풀들이 와글거리는 멋진 세계가 되어 다가온다. 작년 여름만 해도 비가 오면 그냥 비가 오는구나, 날이 맑으면 맑구나 싶었지만 이제 시기적절하게 쏟아지는 비를 보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때 맞춰 내리는 비가 식물들에게 얼마나 훌륭한 영양분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주기 당번을 뺄 수도 있는 소중한 날이다)


이제 세상을 바라보는 당신의 시선은 변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당신은 정원에 비가 내리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햇살이 비치면 그건 정원을 밝게 비추는 햇살이다. 저녁이 되면 정원이 휴식을 취하겠구나 생각하며 기뻐한다.    - 카렐 차페크 <정원가의 열두 달>  


차페크의 말처럼 잠깐 사이에 우리는 많이 변했다. 그리고 앞으로 조금씩 더 달라져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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