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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호연 Sep 27. 2021

80년대생의 '한국인의 밥상'

나를 위한 먹이라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끼니가 된다.

80년대생의 '한국인의 밥상'



개운하게 잘 익은 김치 한 그릇

급하게 지어서 약간 설익은 듯한 흰쌀밥

계란을 입혀 구운 알뜰소시지 반찬 (feat.케첩)

살짝 데쳐 무친 콩나물과 바삭 짭짤한 김자반.


80년대생을 대상으로 하는 '한국인의 밥상' TV 시리즈를 만든다면 가장 먼저 나올 듯한 상차림이다.

('국물'이 필수가 아닌 점까지 포함)


다 아는 맛의 음식을 먹을 때면 이 맛을 아는 사람들, 비슷한 시대의 유행을 겪은 이들이 떠오른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물론이고 'K-'자가 붙은 많은 것들에 엮이기 싫어하면서도 음식을 먹을 때만은 내가 빼도 박도 못하는 한국인이라는 걸 실감한다. 고작 밥상에서 소속감을 느낀다니 흥미로운 일이다. 본래는 김치도, 소시지도, 김자반도, 흰 쌀밥 마저도 자주 먹어온 음식은 아니다. 자취를 하기 전까지 본가에선 꽁보리밥을 먹었고, 가부장의 등쌀에 소시지나 햄, 어묵, 케첩 같은 가공식품은 감히 상에 오르지 못했다. 어쩌면 그래서일까? 이날따라 나는 80년대생들에게 가장 익숙할, 이 밥상의 한국적 평범함에 기분이 고조되었다. 


  '역시 쌀밥은 맛있구나. 현미밥만 먹다가 흰쌀밥을 먹으니 또 별미다. 흰쌀밥은 설익은 것도 매력이지. 씹으면 쌀을 씻을 때 뽀얀 쌀뜨물에서 맡았던 향긋한 냄새가 나거든. 이 김치는 시판인데도 생각보다 괜찮네. 김치를 사면 냉장고에 냄새가 배는 게 신경 쓰이지만 그래도 김치는 쓸 데가 많지. 있으니까 좋은 것 같다. 음...이 소시지는 계란을 안 입히고 구우면 속이 더 보들보들한데 형식적으로 계란을 입혀 봤어. 계란 유통기한이 얼마 안 남아서 얼른 써버릴 생각이었거든. 그거 알아? 재료가 뭐든지 계란을 입혀 부칠 때는 젓가락이나 뒤집개가 아니라 숟가락으로 놓아야 계란물이 고르게 놓여. 부드러운 것을 뒤집을 때도 찢기거나 상하지 않고 말이야. 콩나물은 아까 400g 한 봉지를 다 데쳤는데 절반이 이 정도야. 딱 한 그릇. 나머지 절반은 내일 먹으려고 냉장고에 넣어뒀지. 내일은 양배추랑 당근을 잔뜩 썰어서 남은 콩나물을 넣고 쫄면 해먹을 거야. 면보다는 채소를 먹는 느낌으로.' 


먹는 동안에 먹이에 대한 많은 생각이 스쳐가고, 또 그 다음의 먹이를 생각한다. 내가 이런 생각들을 모두 입밖으로 절제 없이 쏟아내는 사람이었다면 아무도 나와 겸상을 하지 않겠지만, 다행스럽게도 나는 먹는 동안에 묵묵히 음식을 씹으며 말을 아끼는 편이라 동거인과 대부분의 식사를 함께 하고 있다. 먹는 동안에 먹는 생각만 하는 것은 마음을 비우는 명상과 다르지 않다. 일상에서 나를 뒤채는 여러 감정, 사건들을 잠시 보이지 않는 데 놓아두고 내 앞의 오감을 자극하는 대상에 적극적으로 사로잡히는 것이다. 보고, 냄새 맡고, 씹고, 맛을 느끼고, 그러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소리- 수저가 식기에 부딪히는 소리, 식재료에 따라서 달라지는 씹는 소리, 음식에 침이 섞여들어 질척한, 가끔은 귀에 거슬리는 소리까지-를 듣는다. 이런 습관은 꽤 오래되었다. 남들보다 느리게 먹고, 즐기면서 먹는 나를 재촉하거나 나무라지 않고 오히려 흡족해 하던 나의 모친 덕분이 아닐까 한다. '잘 먹는' 일은 음식을 마련한 사람의 노고를 놓치지 않고 새기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먹이를 준비한 나를 위해서도, 먹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대단한 차림이 아니어도 좋다. 다 아는 맛이라도 얼마든지 즐길 수 있다. 

나를 위한 먹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운 끼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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