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호연 Sep 29. 2021

몸을 데우는 오트밀죽

아침부터 따끈한 오트밀죽이 생각나면, 그야말로 가을이다.



나와 동거인은 가을부터 겨울, 이른 봄까지 대개 첫 끼니로 오트밀죽을 먹는다. 아침부터 따끈한 오트밀죽이 생각나면 그야말로 완연한 가을이다. 오트밀죽 한 그릇을 다 먹고 나면 온몸이 더워져서 여름에는 곤란하다. 내 몸이 '이제는 집에서도 긴바지를 입어야겠다'고 느낄 때, 그때가 바로 오트밀죽을 개시할 타이밍이다. 식도를 타고 내장과 온몸을 서서히 덥히는 유동식의 묘미는 몸에 한기가 들었을 때 더욱 반갑다. 


오트밀(oatmeal)은 귀리(oat)를 볶아서 누르거나(압착) 부수어 가공하기 쉽도록 만든 것이다. 모든 것의 효능을 알려주는 아침 예능처럼 소개하자면, 오트밀죽은 식이섬유가 풍부하고 단백질 함량이 높아 건강에 좋은 식사다. 혈당이 오르는 속도가 낮아 공복에 먹기 좋고, 칼로리가 낮은 데 비해 오랫동안 속이 든든하고 조리가 쉽다. 이 '효능'들은 물론 슈퍼푸드로서 대단한 장점이다. 하지만 내가 오트밀죽을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고민하거나 선택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집에서 일하는 프리랜서에게도 아침은 간편할수록 좋다. 아침은 하루 중 집중이 가장 잘되고, 수면으로 충전한 에너지와 의욕이 가장 넘치는 때다. 무엇이든 선택을 어려워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무엇을 먹을지' 생각하는 것마저 적잖은 에너지가 든다. 그러니 아침 시간의 효율을 높이려면 먹는 것도 어느 정도 규격화되어 있어야 한다. 오트밀죽은 들어가는 재료와 분량, 조리 시간을 모두 정해두었다. 마치 세수를 하거나 이를 닦는 일상의 습관과 마찬가지로 내가 원하는 아침을 만들기 위해 수행하는 하나의 단계가 되는 것이다.


식사용 오트밀은 단순 압착 귀리보다 알갱이가 잘게 부수어져 있어 물에 쉽게 불고, 끓이면 빠르게 호화된다. 물에 불린 오트밀을 전자레인지에 넣어 돌리면 간단히 완성되지만, 귀리가 익고 부푸는 과정에서 내용물이 과하게 넘치는 경우가 많다. 익은 정도도 일정하지 않고 식감이 제각각이다. 그래서 쉬운 길을 마다하고 불에 올려 직접 끓인다. 먹는 과정이 규격화가 되다 못해 '이렇게 먹어야 한다'는 강박의 일부가 되어버린 모양이다. 


어쨌든 일 년에 절반 정도는 오트밀죽을 먹는 셈이니 이만큼 손에 익은 음식도 드물다. 먼저 전기포트에 물을 넉넉히 끓이고 손잡이에 있는 냄비에 오트밀 반 컵(약 40g, 1인분)을 담는다. 소금은 1인 분에 한 번씩 꼬집어 넣는다. (아프겠다) 오트밀에 끓인 물을 부어 휘휘 젓고 5분 정도 방치한다. 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오트밀이 부푼 상태가 되면 두유를 반 컵 정도 넣고 불에 올린다. 김이 오르며 끓기 시작하면 그간 볶아지고 눌려지고 부서져 있던 귀리들이 촉촉한 알갱이가 되어간다. 매번 이 순간이 좋다. 귀리 조각들이 '난 곡식이었어!'하고 스스로 깨닫는 것처럼 보인다. 


죽을 끓이다 보면 어느 순간 덩어리가 무거워지면서 언제 튈지 모르는 상태가 된다. 겁이 많은 나는 얼른 불을 줄인다. 끓는 죽이 튀는 건 점도가 높아 내부의 열 순환이 되지 않아서인데, (혁명인가?) 그 속사정을 눈으로 확인할 수 없으니 모두 잘 섞이도록 착실히 저어가며 달래는 수밖에 없다. 센 불에 끓이면 수분만 날리고 귀리가 익을 기회를 놓치므로, 반드시 약불이나 중불에 익힌다. 도중에 점도를 보면서 물이나 두유를 추가한다. 말이 길어 복잡해 보이지만, 실은 아주 단순하다. 실리콘 주걱을 들고 냄비 벽과 바닥을 살살 긁어주다 보면 금방 완성된다. 뜨거운 물에 미리 불린 오트밀은 아주 빠르게 익으니까. 


부드럽고 고소하며 촉촉한데 씹히는 맛이 있다. 특별한 음식은 아니지만 늘 맛있다. 오늘도 오트밀죽으로 점심때까지 버틸 힘을 벌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탈하고 싶은 날일수록 오트밀죽은 좋은 속임수가 된다. 아침에 이토록 건강한 음식을 먹었으니 점심에는 조금 일탈을 해도 괜찮겠지, 싶은 것이다. 미래에 올 죄책감을 미리 상쇄해주는 마법의 음식이랄까. 














매거진의 이전글 80년대생의 '한국인의 밥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