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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호연 Oct 24. 2021

메도빅과 냉보이차

단촐해 보이지만 입에 넣으면 진한 풍미에 압도된다.

베이킹을 하는 사람에게 빵과 과자, 케이크의 본고장은 프랑스로 여겨진다. 제과제빵을 진지하게 배우고자 하는 이들은 프랑스에 유학을 가 베이킹 스쿨 '르 꼬르동 블루(le cordon bleu)'에서 수학하기를 소망하고, 교육과정을 마치고 돌아와 파티셰*가 되는 꿈을 꾼다. 그러나 그것은 먼 세계의 일. 한국의 디저트는 이웃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한국에서 생일 케이크로 가장 많이 팔린 과일을 얹은 생크림 케이크는 일본식 쇼트케이크(shortcake)와 유사하고, 최근 몇 년 사이에는 대만의 디저트가 차례로 들어와 인기몰이를 했다. 이제 버블티와 망고 빙수, 누가 크래커는 한국에서도 국민 디저트로 자리 잡았다. 


*파티셰(patissier) : 프랑스어로 케이크, 빵, 쿠키 등의 디저트를 만드는 요리사를 말한다. 영미권에서는 '페이스트리 셰프(pastry chef)'라고 부른다. 


이에 비하면 러시아는 지리적으로는 가까우나, 마치 프랑스처럼 멀고 이질적인 나라처럼 느껴진다. 아마도 타국의 문화에 친밀함을 느끼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음식, 그 나라의 디저트를 먹어 보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 생각한다. 해외여행을 가서 먹었던 음식을 한국에서 그리워하게 되는 것처럼, 가보지 않은 나라의 음식을 먹고 그 나라에 호기심을 갖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다. 나 역시 대만 디저트를 먹고 대만에 가고 싶어졌고, 러시아에 다녀온 이후 러시아식 케이크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아직 covid-19가 없었던 2018년 3월에 나는 친구와 함께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러시아를 여행했다. 우리 역사에서 '연해주'라고 불렀던 곳의 항구도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작해 종착역인 모스크바에서 내려 숨을 고르고, 그토록 동경하던 에르미타주 미술관 관람을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과거 레닌그라드)로 이동하면서 한 달 간의 여행을 마쳤다. 대략 지구의 4분의 1바퀴에 달하는 긴 여로에서 우리가 가장 많이 만났던 케이크가 바로 러시아 꿀 케이크, 메도빅(Медовик)이다. 


메도빅의 재료는 다른 양과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독특한 것은 만드는 과정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케이크는 처음부터 시트를 도톰하게 구운 것을 3겹으로 썰어 사이에 충전물을 채우는데, 메도빅은 처음부터 시트를 아주 얇게 굽는다. 두께는 팬케이크 정도. 많게는 10겹 이상의 시트를 각각의 오븐 팬에 따로 굽는데 일반 가정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번거로운 작업이다. 종종 집에서 케이크를 만들어 먹곤 하지만 메도빅은 감히 도전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러시아에선 외진 마을 슈퍼에도 흔하게 팔던 케이크라 소중함을 몰랐다. 오히려 한국에 와서야 메도빅을 진심으로 갈구하게 되어서 케이크집이 있는 동네에 갈 날만을 기다리고 기다렸다. 내가 즐겨 찾는 메도빅은 대충 '동대문 근방'으로 불리는 서울 광희동의 '러시아 케잌(상호명)'에서 구입한 것이다. 광희동에는 러시아 식품점이 많은데, 집집마다 파는 메도빅의 크림과 시트 배합이 조금씩 다르다. 그 동네에서 먹어본 것 중에는 '러시아케잌'의 메도빅이 제일 맛있었다. 


메도빅은 구운 시트를 부수어 올린 것 외에는 토핑이 따로 없어 초라해 보이지만 입안에 넣으면 그야말로 진한 풍미에 압도된다. 포크를 대면 촉촉한 시트가 저항 없이 스르륵 무너지는데, 진한 꿀과 옅은 계피의 향이 얼마나 향긋한지 사워크림의 신맛이 미미하게 느껴질 정도다. 아주 달콤하지만 충분히 음미할 수 있을 만큼의 단맛이어서 곁들이는 차는 단맛으로부터 도망치는 용도가 아니라 그저 혀를 리셋하여 다시금 케이크의 향을 오롯이 느끼도록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크림이 든 케이크는 한 번에 한 조각 이상 못 먹지만, 좋아하는 케이크라면 사정이 다르지. 메도빅을 두 조각 먹어치우고 나서 스스로 놀란다. 내가 이만큼 좋아하는구나, 하고. 코로나 시대 이전에 매장에서 메도빅을 먹을 때에는 홍차를 주문하면 유리잔에 그린필드(Greenfield) 티백이 담겨 나왔는데, 그게 또 정겨웠다. 러시아 여행을 하는 동안 홍차를 마시면 열에 아홉, 그린필드 티백이었기 때문에. 집에서는 마침 동거인이 우려 놓은 차가운 보이차와 함께 메도빅을 즐겼다. 


코로나 시대의 자영업이 그렇듯, 영업 부진으로 문을 닫았을까 걱정했는데 가게 안에 포장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다. 사장님 부디 많이 버시고 계속 팔아주세요. 러시아에 다시 안 가더라도, 메도빅은 영원히 먹고 싶어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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