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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호연 Dec 10. 2021

몰래 먹는 보름달

남들 몰래 허겁지겁 먹어치우는 빵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찐빵을 호호 불어 먹는 계절이다. 마켓 매대에 진열되어 있는 찐빵 행사 상품을 곁눈으로 슬쩍 보고 지나친다. 며칠 전부터 찐빵이 먹고 싶었지만, 웬만하면 SPC그룹의 손이 닿은 제품은 먹지 않겠다고 결심한 터였다. SPC그룹은 한국의 식품업계, 그중에서도 제빵업계를 좌우하는 거대기업이다. 이들이 저지른 불공정거래나 보건위생법 위반 사항을 일일이 열거하지는 않겠지만(가장 최근에는 던킨 도너츠의  사례(관련 기사 클릭)*가 있다) 몇몇 사실을 아는 이상 소비하지 않으려고 한다. 삼립도 그중 하나로 정식 명칭은 '주식회사SPC삼립'이다.


하지만 결국 나는 '보름달'을 샀다. 그리고 먹었다. 보름달은 '삼립 호빵' 다음으로 내게 익숙한 빵이다. 삼립식품의 보름달은 내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부터 수퍼에 가면 있는 빵이었다. 1976년에 출시되었는데 2021년인 지금도 편의점에 들를 때마다 눈에 띈다.


달토끼가 그려진 귀여운 포장지. 실제 보름달은 찐빵과 더 닮았지만 나는 이 빵을 함냐- 베어물 때마다 이것이 달을 먹는 느낌일까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어릴 때만 해도 동네 제과점의 빵과 양산빵의 차이를 몰랐다. 그리고 그때는 밀가루와 버터, 계란을 베이스로 만드는 케이크류의 빵을 좋아하지 않아서 보름달도 내 의지로는 사먹지를 않았다. 그럼 왜일까. 왜 이렇게 익숙할까. 기억의 가장 아랫부분을 들여다 보니 떠오르는 조각이 있다.


맞아, 이 보름달은 할머니가 좋아하는 빵이었어.


할머니(모친의 모친)는 평소 '먹는 일'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분 같았다. 간식을 먹는다면 입이 심심해서이지 음식을 즐겨서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할머니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는 분명히 알았다. 할머니는 표현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는데도 나는 아주 신중하게 할머니의 호불호를 파악하려 애썼다. 할머니가 나에게 그러했듯이, 나도 할머니에게 좋은 것만 드리고 싶었다.


수퍼에 가서 빵을 사면 나는 크림빵을 고르고(이것도 좋아하지는 않았다. 덜 달아서 샀을 뿐), 할머니는 보름달을 골랐다. 함께 수퍼에 가는 일은 많지 않았는데, 어쩐지 그 기억이 선명하다. 맞아, 할머니는 보름달. 카스테라처럼 부드럽고 달콤한 빵을 좋아해. 크림은 느끼하다고 싫어하셔. 굉장히 중요한 일이니까 반드시 기억해두자- 그렇게 어린 모호연은 생각했던 모양이다.


한참의 세월이 흘러 내가 20대 후반이 되고 1년에 365일 일하는 방송작가가 되었을 때, 나는 종종 보름달로 허기를 달랬다. 어느 날은 옥수수빵, 어느 날은 크림빵이었지만 어쩐지 그때부터는 보름달이 제일 맛있는 빵 같았다. 전형적인 워커홀릭으로 종일 굶다가 뱃속에 이것 하나 집어 넣으면 정신이 확 들면서 긴장이 풀렸다. 크림은 설탕이 마저 녹지 않아 자근자근 씹히고 대체 어떤 기름을 썼는지 속이 니글거리는 맛이 났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이유는 도통 몰랐지만 어쨌든 보름달을 먹으면 힘이 났다. 빵의 맛을 음미하기보다 입안에 욱여넣듯 단숨에 먹어치웠다. 그러고 나면 참 허무했다. 속이 달아서 더는 무엇을 먹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좋아하지도 않는 빵을 허겁지겁 삼키는 꼴이 짐짓 처량하게 느껴졌다. 알 수 없는 연민과 함께 자기혐오가 치밀었다.  


나는 왜 이렇게 궁상맞을까.


보름달을 먹을 때마다 했던 생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가끔은 보름달이 '필요했다'. 남들 몰래, 허기를 달래기 위해 먹는 빵. 그 빵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만드는 기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내 알 바 아니었다. 나는 대체로 가난했고 수퍼나 편의점에서 빵을 사먹는 것은 가장 저렴하게 배를 채우면서 뇌가 필요로하는 당을 채우는 방법이었다. 간식을 따로 사먹을 일도 없으니 1석 2조였다.


이제는 질 좋은 재료로 직접 만든 케이크와 빵에 입이 길들여져 굳이 대형 프랜차이즈의 빵을 사먹지는 않지만, 아주 가끔 편의점에서 보름달 빵을 보면 그 시절이 떠오른다. 자기연민과 혐오에 찌들었던 시절, 즐겁지 않으면서도 나는 왜 그 빵을 그토록 탐식했는지. 보름달에 대한 긍정적인 기억이라곤 '할머니가 좋아했던 빵', 그것밖에 없다. 오로지 그것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단숨에 나의 뿌리를 모조리 잃어버린 것만 같았던 시절, 어쩌면 나는 할머니와 조금이라도 연결될 방법을 찾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본능이 나를 계속 먹이고, 극도로 우울했던 나를 어떻게든 살리고, 이제 와 다시 회상하며 불매하는 기업의 빵을 집어들게 됐는지도 모른다. 불매라니. 그럴 수 있는 선택지가 나에게 있다니. '나' 이외의 세상에 관심을 가지고 사회의 문제를 들여다 보고 조금이라도 변화를 바라는 행동을 하려는 의지가 나에게 있다니. 보름달빵으로 남들 몰래 허기를 채우던 시절의 나와 아주 다른 마음으로 같은 빵을 먹었다.


부드럽고, 달콤하고, 크림에서는 여전히 설탕이 씹힌다. 예전보다는 좋은 기름을 쓰는지 맛이 많이 상향되었다. 적어도 2021년의 '빵 입맛' 높아진 사람들에게 무리 없이 팔릴 만한 빵이었다. '정통'이라는 단어를 붙였지만 사실 이것은 2021년의 보름달이지 그 맛이나 향은 옛날의 보름달과 다르다.


불매를 한다면서 역으로 광고를 한 셈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보름달'은 내게 의미 있는 빵이었다. 내가 그 사실을 이제야 알았을 뿐.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나는 매일 보는 익숙한 음식들에 대해 앞으로도 진지하게 생각해 볼 것이다. 할머니와 내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진심을 다했듯 나도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또 무엇을 싫어하는지, 그 이유를 찾으며 진심으로 아껴줄 생각이다. 아마 1년에 한두 번 정도는 보름달을 먹을지도 모르겠다. 마음 바닥에 고여 있는 그리움을 퍼올리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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