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의 가능성에 도전하는 무모함
건축가는 연극배우들과 유사한 면이 많다. 자존심 강하고, 자기 직업에 대한 자기애가 강하다. 내가 말하는 건축가는 대형 기업화된 조직에서 일하는 건축가가 아닌 자기 이름으로 공방 _ 일명 아틀리에 형식으로 일하는 이를 말한다. 대형 기업화된 조직에서 건축가는 전체의 부분으로 여러 가지 건축을 조립 생산 기획하는 역할을 한다.
하나의 건축이 수명의 건축가들에 의해서 다듬어지면서 형태적 세련미를 더하고 완성되어 가지만, 창작의 정체성은 모호하고 익명적 결과물로 탄생한다. 고유의 작가주의를 설명하기 어렵다. 이런 이유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대형조직화된 기업의 건축은 그다지 이론과 비평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드물다. 다만 유럽의 대형 건축가 조직은 조금 양상이 다르다. 조직도 대규모이나 디자인의 성과물에 있어서는 작가주의가 드러난다. 작가성과 조직의 대형화가 가능한 이유는 유럽 특성이 건축의 정체성을 인정해 주고 대형 프로젝트 설계기회를 이런 작가주의가 드러나는 건축가에게 맡기기 때문이다.
유럽이 건축을 리드하는 이유는 대형 건축 프로젝트의 건축작가주의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작가주의는 매우 중요한 건축가를 인정하는 기본 시각이다. 그리고 이런 작가주의 건축가가 성장하는 배경은 실무적 경험과 성공경험이다. 실무적 경험은 곧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연극배우와 비슷한 건축가 아틀리에 처지라 한 것은 유럽이나 일본과 전혀 다른 어설픈 미국식 건축 행정 제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만들어진 현상이다. 그러나 미국 또한 이런 작가주의 건축가를 인정한다.
경쟁이 소멸시킨 한국 공공건축의 작가주의
안타깝게도 한국에서 건축의 작가주의는 공공과 민간 모든 영역에서 희박하다. 그나마 민간 건축 설계 시장에서는 건축 발주자의 개인적 선호도와 취향에 의해 정체성이 드러나는 작가주의 건축가를 인정하는 경우가 있다. 그나마 이런 시장이 존재하기 때문에 한국건축가의 명맥이 이어지는 것이나 이는 매우 희박하고 드문 일이다. 심지어 건축설계를 진행하는 다수의 건축가들, 건축사들 조차 이를 포기하고 척박한 한국 건축 설계 시장에 생존하고 있는 형국이다.
더더욱 공공은 건축가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공정, 객관성이라는 명분을 내걸지만 기본적으로 한국 공공건축에서 작가주의의 인정은 비난과 비판, 지독한 경쟁사회에서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공공건축의 공모전 요강에는 아예 익명적인 디자인을 요구하는 문구가 있다. 물론 이런 문구가 있는 이유는 선정과정의 로비나 잡음 등이 지겹도록 끊이지 않기 때문인데.... 이런 현실이 건축의 본질적 경쟁력을 갉아먹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한국의 건축이 원래부터 이렇고 싹자체가 없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어수룩했던 시절 오히려 지금보다 더 작가주의 공공건축이 가능했었다. 60~70년대 공공건축을 보면 이런 작가성이 공공건축 당선에 영향을 주었고, 수많은 건축 작품들이 가능했다. 지금은 사라진 제주대학 본관 (김중업 설계), 청주시청사 (강명구), 수많은 벽돌로 지어진 공공건축 (김수근), 세종문화회관 (엄덕문) 등이 그렇다. 이런 흐름이 80년대부터 공정과 객관성이라는 명분으로 익명성에 가중치가 부여되면서 작가주의가 드러나는 건축은 공공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런 흐름은 40년간 이어졌다. 물론 공공건축 당선과 계약은 진행되었고, 훌륭한 건축작품들이 당선되었지만 냉정히 말해서 건축가의 작가성을 설명하고 비평할만한 연속성을 가지지 못한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로비나 부정부패가 사라진 것도 아니다.
다만 해외 건축가들의 경우는 전혀 다른 대우를 받았다. 그들은 그들의 정체성 덕분에 공공건축 경쟁 참여의 우대를 받았다.
건축은 상당히 기호적 선택이 가능한 분야이기도 한데, 공공건축 또한 마찬가지다. 이런 공공건축 기호성은 국내 건축사에겐 허용되지 않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국내건축사 역차별이라고 하아?
이런 배경에는 지독한 식민지 열등감 DNA가 존재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아니면 애당초 강력한 중앙집권 행정체제의 나라에서 오랫동안 내면화된 중앙중심적 사고, 즉 지방은 열등하고 서울은 우수하다는 근거 없는 인식이 세계를 대상으로 해서 한국은 열등하고 선진해외는 우수하다는 자기 비하적 편견이 내면화된 것이 아닐지 모르겠다.
이런 풍토 덕분에 21세기의 한국에서 공공건축에 있어서 작가성은 국내 출신에게는 인정되지 않는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 버렸다.
건축사의 전문화를 표방으로 대학교육 체제가 바뀐 지 20년이 넘어가고, 한때는 청소년들이 꿈꾸는 직업으로 선망되기도 했었다. 90년대 잠시나마 돈 잘 버는 의대보다 꿈꾸는 건축학과가 성적이 더 높았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이런 환상을 여지없이 깨버렸다. 물론 지금도 돈 잘 버는 건축사가 많다. 특히 대형 건축사사무소는 수익이 좋다. 국가정책이 이들을 우대하는 시스템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발주자의 비 전문성에서 출발한다. 누구나 발주할 수 있다는 생각은 건축이 아닌 건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어떤 형태나 미학적 구성에 대한 판단을 제거하면 남는 것은 재료와 구성, 조립이나 제조과정만 남는다. 이는 비전문가 누구라도 해석하고 판단할 수 있는 요소다. 당연히 특별한 공법과 특별한 시공방식, 특별한 재료의 인정은 불가다. 누구나 만들 수 있고,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그런 성과물이어야 된다. 이런 명분은 공정과 객관성이다. (그렇다고 공정성을 확보한 것도 아니다. 21세기 여전히 공정성 문제로 시끄럽다. 왜냐면 공정성은 불가능한 명제다. 오차범위를 줄일 수 있어도, 제거되지 않는 명제다. 공정성에 매달리면 건축의 본질을 확보하기 어렵다. )
극단적으로 말하면 국내 건축교육과 과정 경험으로 0.1% 작가주의 건축사는 물고기가 당장 육지로 걸어 나오는 것과 같다.
너무 우울한가? 그만큼 어렵다는 것이다. 조건이 너무 많이 필요하다. 본인의 노력 10% 주변의 협조 10% 좋은 선배로부터 배우는 실무경험 10% 주변의 평판 10% 경제적 여유 10% 경제상황 같은 시류의 운 50% 그리고 보너스로 본인의 낙천적 성격 +a
특히 2000년대 이후 학번은 작가주의 건축사 아니 간축가로 성장하고 주목받을 확률은 소수점이다. 하나 두 개 작품 기회 있겠지만 지속성은 보장 안된다.
이런 환경은 기성 건축사나 건축가 또는 교수의 책임 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과거에도 같았으니까.. 다만 그때는 건축사나 건축가가 몇 명 없었고 지금은 멸치 떼처럼 많다. 환경은 오히려 과거보다 더 나빠지고 있다… 관련 법도, 제도도, 시스템도 한국에서 나고 자란 건축기술자를 원할 뿐 창작하는 건축가를 배척하기 때문이다.
작가주의 한국건축가 고사는 이제 시간문제다. 정말 하고 싶다면 하버드 나온 교수 밑에서 졸업장 받고, 본인이 다시 유학 가면 가능성이 생긴다. 다만 장담은 어렵다. 알아서 판단하시라…
건축가!!! 풍류나 취미로는 최고의 직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