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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인 Feb 12. 2024

잊지 못할 결혼기념일

한국 100대 명산 도전기

다른 사람들은 결혼기념일을 어떻게 보낼까?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달달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그동안 고마웠던 일에 대해 얘기할까?


3주년 결혼기념일 새벽 5시. 그렇다. 나는 등산 가방에 짐을 싸고 있다. 냉장고에서 꺼낸 시원한 물 2리터, 당 충전을 위한 초콜릿과 사탕, 안전을 위해 장갑도 챙겼다. 6월의 더운 날씨로 인해 루루는 이온음료까지 챙기라고 했다. 최대한 무게를 줄이고 싶은 나는 싫다고 버텼지만 결국 가방 옆 주머니에 음료수를 끼워 넣었다. 최대한 짐을 줄여서 몸을 가볍게 하는 게 내 스타일이고 루루는 언제 뭐가 필요할지 모르니 일단 다 챙기는 스타일이다. 우리 부부는 먹는 것부터 입는 것까지 서로 원하는 것이 정반대인 게 많다.

 

거실 바닥에는 내가 입을 등산복이 놓여있다. 등산가는 날이면 루루는 모자부터 양말까지 옷을 코디해 준다. 오늘 의상은 무릎까지 오는 긴 하얀 양말에 노란 반바지다. 아직 잠이 덜 깬 나는 옷을 입으며 입이 삐죽 나온다. ‘결혼기념일까지 등산을 해야 속이 시원하겠냐.’

 오늘 가는 산은 북한산으로 여섯 번째 도전 산이다. 학창 시절 시험문제로 북한산이 나왔다. ‘다음 보기 중 한국에 없는 산은?’ 나는 3번 북한산을 찍었고 당연히 틀렸으며 그 뒤로 북한산을 잊지 못했다. 드디어 그 산에 오르다니, 신기했다.

 

아침 7시 북한산 주차장에 도착했다. 어김없이 무거운 가방을 메고 단단한 등산화를 신으며 시작도 전에 얼른 산행이 끝나길 바랐다. 얼른 내려와서 맛있는 식당에 갈 생각뿐이었다. 등산 코스는 전부 루루가 정하지만 나도 인증해야 될 정상 이름 정도는 알고 간다. 북한산 인증은 백운대였다.


 처음부터 오르막길. 몇 걸음 안 걸었는데 커다란 바위가 나왔다. 나는 등산객을 위해 친절하게 설치된 철봉을 잡고 조심스럽게 올랐다. 언젠가 루루와 택시를 타고 산에 간 적이 있었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기사님이 등산복을 입은 우리를 보고 말했다.

 “내가 젊었을 땐 산이 위험했어요. 지금처럼 길이 정돈되지 않아 험하게 자란 풀과 나무를 헤치고 길을 만들어서 갔지요. 지금 한국은 등산하기 좋은 나라에요.”

 공감한다. 나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도 등산로로만 잘 다니면 안전하다.

 나는 철봉 잡고 오르고, 바위 잡고 오르고, 거의 기다시피 올랐다. 아침 7시부터 올랐는데 벌써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정상이 어디인지도 모르겠고 그렇게 챙기기 싫었던 이온음료는 빈병이 된지 오래다. 결국 정상에서 먹으려고 했던 컵라면에 물을 부었다. 루루가 산 텀블러 물은 아직 뜨거웠다. 크게 집은 면발을 입에 넣으며 루루에게 물었다.

 “루루. 솔직히 말해. 인증하는 곳이 어디야?”

 나는 상당한 길치로 지도를 봐도 거리감이 없고 왔던 길도 처음 본 것처럼 생소하다.

 “실은… 의상능선을 한 바퀴 돌고 백운대 찍고 원점으로 회귀하는 코스야.”

 “정상으로 바로 가는 게 아니었어?”

 “의상능선이 가장 빡센 코스야. 그래도 북한산성을 한 바퀴 돌면 의미가 있잖아. 언제 이렇게 해 보겠어”

 “미친!!!!!”

 나는 3M 장갑을 그에게 던지며 돌아간다고 소리쳤다. 그렇다. 오늘은 결혼기념일이고 우리 부부는 북한산성에서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미 많이 올라와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이번에는 헤드랜턴까지 가방에 든든하게 들어있었다.

 나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한발 한발 앞으로 나가는 것에만 집중했다. 얼마만큼 갔을까. 눈앞에 ‘커다란’이라는 표현도 어설프다. ‘거대한’이라는 표현도 겸손하다.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형용할 수 없는 바위가 나타났다. 공포가 느껴지면서 동시에 아름다워 눈물이 날 것 같은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드디어 북한산과 마주했다. 거리가 꽤 있었지만 아주 가깝게 느껴지는 크기였다. ‘잠깐, 아직도 정상이 왜 이렇게 높아? 앞으로 더 올라가야 된다고?’ 나는 자연에 대한 경이로움과 루루에 대한 살의를 느끼며 등산스틱에 몸을 의지해 걸어 나갔다.


 북한산은 온통 암석이다. 바로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은데 어떻게 오르지? 하지만 막상 가보면 바위에 철봉을 박아서 등산객을 위해 안전하게 길이 나있다. 장갑이 없었으면 오늘 손바닥에서 제대로 피 볼 뻔했다. 이런 경관은 처음이라 해외에 온 듯 했다. 바위와 햇빛이 만나 모래 같은 인상을 주어 사막에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단순해서 또 이런 경치 앞에 행복해진다.

 “루루, 우리 해외로 결혼기념일 여행 온 거 같아”

 루루는 그런 내 모습에 살짝 안심한 눈치다. 정상은 바람이 상당히 많이 불었다. 정상에 있는 태극기가 펄럭이며 이곳이 대한민국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비행기를 타야지만 여행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조금씩 여행에 대한 편견을 깨고 있었다.


 인증하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더니 ‘쏴아’소리를 내며 쏟아졌다. 나무가 없어서 비를 피할 수가 없어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내려갔다. 바로 위에 샤워기가 틀어있는 것처럼 온몸이 젖었다. 물론 양말까지. 양말이 물을 한가득 머금으니 발걸음이 무겁고 불편했다. 온통 암석이라 내려가는 길이 미끄러워 상당히 위험했다. 내 앞에서 내려가던 젊은 청년들은 겁도 없이 등산화가 아닌 운동화를 신은 바람에 엉덩방아를 여러 번 찧었다. 청년들의 꼬리뼈가 괜찮을지 걱정이 됐다. ‘등산화가 이렇게 중요하구나.’

 그 와중에 루루는 또다시 허리 통증을 호소했고 나는 어둑해진 주변을 둘러보며 평평한 바위를 찾아 주저앉았다. 신발을 벗고 양말을 짰다. 100대 명산 도전 중 고작 여섯 번째 산인데. 정말 포기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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