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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인 Jan 29. 2024

해가 지기 전에

한국 100대 명산 도전기

해가 졌다. 파랗게나마 보였던 시야마저 어둠에 사로잡혀 한 발자국 내딛는 것조차 무리였다. 잘못 디뎠다가는 발목을 삐끗해 큰 부상을 당할 수 있었다. 산짐승이라도 있는 건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밝은 때는 그렇게 아름다웠던 산이 어두워지자 공포로 변했다. ‘무사히 다치지 않고 내려가게 해주세요.’ 기도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10시간 전 우리는 이곳 소백산에 올랐다. 소백산은 우리에게 4번째 도전 산이다. 해발 1439m의 희고 높고 거룩한 '작은 백산' 소백산! 등산을 시작한 지 두 달도 안 된 우리에겐 다소 무리가 있는 산이지만 철쭉을 보기위해 겁 없이 도전했다.

 아침 일찍 김밥을 싸고 집에서 8시가 안 돼서 출발했다. 내가 만든 김밥은 집에서 먹으면 맛없지만 산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시금치와 오이, 당근이 빠진 기본에 충실한 나의 김밥 재료는 이렇다. 단무지, 햄, 계란, 맛살. 국물과 김치가 없으면 팍팍해서 맛이 없다. 하지만 산 정상에서 먹으면 달콤한 한식이 된다.

 희방사 주차장에 도착했을 땐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만석이었다. 우리는 간신히 구석에 주차하고 단단한 등산화로 갈아 신었다. 물 2리터와 김밥이 들어간 가방이 묵직해서 몇 걸음 걸으니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등산화와 등산가방은 튼튼한 대신 무게가 나갔다. 그 옆에서 루루는 아이처럼 신이 났다. 다행히 하늘이 맑아 정상에서 보는 풍경이 기대가 됐다. 국립공원 스템프는 산에서 내려와 찍기로 하고 힘차게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짙푸른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들어와 눈에 아른거렸다. 온몸에 빛을 흡수한 풀들은 보는 이의 마음을 깨끗하게 정화했다. 등산화가 흙과 바위에 닿을 때마다 내 귀에 작고 육중한 발소리가 났다. 자연 안에서 오감이 즐거웠다. 아직까지는 편한 길이었다. 어디선가 시원한 물소리가 들리더니 눈앞에 희방폭포가 펼쳐졌다. 더운 날 만나는 폭포는 샤워를 한 것 같은 개운함을 선사했다.  

 그렇게 잠깐의 행복이 끝나고 무시무시한 돌계단을 만났다. 아무리 올라가도 돌계단이 끝날 줄 몰랐다. 두 손으로 한쪽 허벅지를 잡고 들어 올려 간신히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가까스로 다 올라갔더니 이번엔 나무 계단이 나타났다. 무슨 물을 2리터씩이나 들고 다니냐며 아침부터 투덜거렸던 나는 벌써 가지고 온 물을 다 마셔버렸다. 루루가 자기 몫의 물을 마실 때 옆에서 불쌍한 표정으로 눈빛을 발사했다. 그는 의기양양하게 나에게 한 모금을 주었다. 더 마시려고 하자 치사하게 물병 입구를 손바닥으로 막아버렸다.


 그렇게 오르고 올라 연화봉에 도착했다. 멋진 풍경을 보자 고생이 한 번에 성취로 변했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 그 자리에서 승리를 자축했다.

 "여기가 아니야."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인증을 하기 위해 사진을 찍는 나에게 루루가 단호히 말했다.

 "BAC 인증은 저~~~기 비로봉에서 해야 돼."

 그가 저기라고 말하며 가리키는 방향을 눈으로 훑었다. 욕이 절로 나왔다. 그럼 왜 저 산 아래서 오르지 않고 다른 산 아래에서 올랐단 말인가.

 “이왕 오르는 김에 여러 풍경을 보는 게 좋잖아.”

 나는 주먹을 꽉 쥐고 그를 노려봤다. 그도 등 뒤가 따가웠는지 앞만 보고 발길을 재촉했다. 나는 씩씩 거리며 빌어먹을 봉인지 비루봉인지 인증하는 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몇 분 뒤 분홍 철쭉이 나타났다. 알프스에는 가본 적도 없는 내가 입을 떡 벌리며 소리쳤다.

 “한국의 알프스다.”

 다양한 초록색으로 물든 소백산 능선은 하늘 위에 떠있는 동산 같았다. 산이 아닌 넓은 들녘 같은 모습이었다. 작은 트리처럼 생긴 여러 그루의 나무가 경치 속에 귀엽게 자리했다. 나의 밝아진 표정을 보고 안심한 루루는 행복한 내 모습을 계속 카메라에 담았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능선을 따라 걸으니 비로봉까지 즐겁게 도착했다. 정상에서 김밥 한 입 먹고 눈으로 풍경 한입 먹었다. 머리가 맑아졌다. ‘역시 내 김밥은 산에서만 먹어야 돼.’


그런데 김밥을 다 먹어갔을 즈음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정말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불길해진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4시 55분. 하산도 3시간 이상 걸릴 텐데....... 우리는 얼른 배낭을 메고 다급하게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그때 등 뒤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루루였다.

 “나 허리가 너무 아파. 못 걷겠어.”

 루루는 나무에 기댄 체 울먹거리며 말했다. 깜박하고 진통제를 챙겨오지 못했다. 해는 조금씩 우리가 있는 위치로 내려왔다. ‘우리는 아직 정상인데......’ 더군다나 랜턴도 없었다. 머리가 하얘졌다. 이대로 어두워지면 상당히 위험하다. 산은 낮에는 친절하지만 밤에는 공포 그 자체다. 길이 아닌 곳으로 들어갈 확률이 매우 높다.

 “오빠 가방 나한테 줘.”

 나는 앞뒤로 배낭을 메고 먼저 앞으로 걸어갔다. 조금이라도 밝을 때 길을 찾아놓아야 했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내려갔고, 그때마다 뒤를 돌아 루루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때 한 등산객을 만났다.

 “지금 여기로 내려가시게요? 어이구 서두르셔야겠네. 힘내세요.”

 그 사람 말에 내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렸다. 얼마나 갔을까. 해가 거의 떨어져 가시거리가 짧아졌다.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졌다. 루루는 허리 통증 때문에 악악 소리를 지르며 내려오고 있었다. 5분 지나면 이제 아무것도 안 보일 것이다. 주차장까지 아직 한참 남았고 바위 사이를 위험하게 내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초 단위로 기도 했다. ‘제발 다치지만 않게 해주세요.’

 이제 완전히 암흑으로 변했다. 핸드폰 플래시를 켰다. 배터리 32%. 뒤를 비추니 루루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소리를 내어 내 위치를 알렸다. 아무 소리도 안 들렸다. 나는 그대로 서서 공포를 느꼈다. 두 개의 배낭이 어깨를 짓눌렀다. 온몸은 땀으로 젖었다. 여기서 멈추면 안 돼. 나는 계속 루루를 불렀다. 저 멀리서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루루도 핸드폰 플래시에 의지해 내려오고 있었다.

 “루루, 괜찮아!”

 나는 계속 할 수 있다고 말하며 루루를 안심시켰다. 루루는 허리 통증 때문에 아주 느리게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느리게. 한 걸음. 한 발.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르고 주차장에 무사히 도착했다. 주차장에는 우리 차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저녁 9시였다. 그제야 우리는 안심하며 서로를 보고 웃었다. 많은 감정이 교차했다.

 산은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내려가야 한다는 걸 온몸으로 배웠다. 여름에는 7시, 겨울에는 5시까지 무조건 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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