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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인 Jan 15. 2024

어쩌다 산악인

허리 디스크와 코로나

2021년 갑자기 발생한 코로나 때문에 자주 가던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실 수도, 극장에서 영화를 볼 수도 없었다.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은 안전하지 않다는 인식이 가득해 어딘가에 다녀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누군가의 불안한 대상이 되었다. 강제로 집에 있으려니 몸이 근질거렸다. ‘강제’가 주는 ‘통제’는 오히려 열망을 부추겼다.

그 시기 루루의 허리 디스크가 터졌다. 루루는 점점 증세가 악화되더니 애벌레 같은 포즈로 24시간을 누워있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통증을 호소했고 새벽에 소변을 보지 못해 울다가 잠을 잤다.

신혼이었던 우리는 미래를 어떻게 그려야 될지 막막했다. 젊다면 젊은 나이인 서른 초반. 앞으로 코로나 같은 전염병이 계속 발생한다는 ‘카더라 뉴스’와 확진자가 다녀간 장소를 추적하며 공포를 조성하는 분위기 속에서 나는 한없이 우울했다.

우리는 마스크를 착용하고 손 소독을 수시로 하며 병원으로 갔다. 대기실에서 우울해하는 루루에게 허리가 나으면 뭘 하고 싶은지 물었다.

“행복을 다음으로 미루지 않을래.”

루루의 대답은 의외였다.

아무리 비싸도 입고 싶은 옷 입고, 맛있는 거 먹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래.

루루는 희귀병에 걸린 사람처럼 미래가 아닌 현재를 살겠다는 굳은 다짐을 내비쳤다. 그때 나는 루루의 허리만 괜찮아진다면 뭐든 다 좋았다. 루루는 마약성 진통제를 처방받고 통증이 심할 때마다 먹었다. 효력은 바로 나타났다. 10분 내로 고통이 사라졌고 그는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을 보였다.

“나 등산하고 싶어”

“등산?”

“응. 나 운동하고 건강해지면 좋잖아”

“그건 그렇지”

“코로나 때문에 야외에서 할 수 있는 등산이 딱이야”

“그래.......산에 다니자”

루루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를 차에 태우고 가까운 블랙야크 매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2002년 붉은 악마가 쓰던 응원 수건 같은 BAC(블랙야크 알파인클럽) 수건을 받았다.

“이게 뭐야?”

“블랙야크 알파인 클럽(BAC) 수건이야. 한국 100대 명산에 도전하는 산악인을 뜻하는데 BAC앱을 다운로드한 다음 정상에서 gps(위치 추적)를 인증하고 사진 찍어 올리면 돼.”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별생각이 없었다. ‘백 개의 산 중 몇 개만 오르고 말겠지’라는 생각이 컸다.

초등학교 때 동네 뒷산 몇 번 오르던 게 전부였던 나는 등산에 대한 감이 전혀 없었다. 그냥 한 두 시간 올라가서 ‘야호’하고 내려오는 정도로만 생각했다.

며칠 뒤 집 앞에 택배 상자가 하나 둘 쌓여갔다.

일 마치고 뜯어보니 죄다 등산용품이었다.


이거 정말 필요한 거 맞아?

“사람한테 일을 시키려면 먹을 거하고 입을 건 줘야 되는 거야”

루루는 미소 지으며 등 뒤에 감춰놓은 등산화를 내밀었다. 등산에 빠진 이후로 그는 틈이 날 때마다 등산용품에 대해 공부했다. 유튜브 영상으로 전문 산악인이 추천하는 용품을 꼼꼼히 보더니 결국 하나둘씩 구매하고 있는 모양이다. 루루가 건넨 신발은 국산 제품으로 특히 한국 산행에 특화 된 캠프라인 등산화였다. 발목을 보호하기 위해 목이 긴 형태로 만들어진 예쁜 갈색 디자인이다.

“당신이랑 같이 등산 가려면 등산복(작업복)이랑 먹을 건(맛집) 줘야지.”

다음 날 루루는 신난 표정으로 택배 상자를 열었다. 상자에는 파타고니아 브랜드에서 나온 캐필린 티셔츠가 들어있었다.

“티셔츠는 왜 샀어? 그냥 집에 있는 거 입으면 안 돼?”

“일단 이 셔츠는 가볍고 자외선 차단 기능과 향취 기능이 있어서 땀이 나도 냄새가 안나. 땀 흡

수력도 제법 빠르지”

그가 하는 말이 다 맞는 말 같아서 일단 수긍을했다. 그러나 다음날도 그다음 날에도 택배는 계속 왔다. 상자가 꽤 컸는데 그 안에서 등산 가방이 나왔다.

“가방도 샀어? 집에 백팩 있잖아.”

“수납이 달라. 여름은 18~24L, 겨울은 30~45L 크기가 적당해.”

“이건 또 뭐야? 양말??”

“여름에는 쿨맥스 기능이 있어야 되고 겨울에는 메리노울 소재가 좋아. 그중에서 단터프 제품이 쪼임이 짱짱하고 좋아”

등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루루가 며칠 만에 전문가가 된 것 같았다. 다음 주엔 물병이 도착했다. 매일 택배가 오니 슬슬 걱정이 됐다.

“집에 텀블러 많잖아! 또 샀어?”

“하이드로 플라스크 텀블러는 얼음이 녹지를 않아. 당신 정상에서 얼음물 마시고 싶지 않아?”

“그런데 왜 두 개나 샀어?”

“써모스 텀블러는 물이 식지를 않아. 산에서 컵라면 먹으려면 여기다 끓는 물 담아 가면 돼.”

“이건 뭐야?”

“카타딘 비프리라고 휴대용 정수필터야. 여름에는 더워서 가방이 무거우면 안 되니까 계곡물 담아서 마시면 돼”

“저 뒤에 택배는 뭐야?”

남은 상자에는 헬리녹스 의자와 테이블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작은 상자 안에는 모자와 장갑, 선글라스가 있었다.

“이거 다해서 도대체 얼마야? 정말 다 필요한 거 맞아?”

“500만 원 이상은 썼을 걸?”

루루는 콧노래를 부르며 다음 산행 일정을 짰다. 나는 그 뒤통수를 노려보며 분을 삭였다. 딱히 취미생활이 없는 루루는 평소에 돈을 아끼는 타입이었다. 배달비 3,000원을 아끼기 위해 포장을 하거나 쿠폰이 생기는 날에만 시켜 먹었고 현금 출금기 수수료 1,000원을 제일 아까워했다.

아무래도 그에게 허리 디스크가 찾아온 이유는 다시 한 번 인생을 제대로 즐겨보라는 누군가의 신호였을까. 아무튼 등산이 그냥 산만 오르면 되는 돈 안 드는 취미일 줄 알았는데 이것도 고급 취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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