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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을 주는 모기나라 Jun 21. 2017

보은 답사 - 동학농민혁명 유적

녹두꽃 향기 가득한 세상을 향한 사람들의 발걸음

우리에게 동학하면 경주의 최제우와 공주의 우금치, 그리고 전라도가 떠오르고 실제 교과서에도 전라도 중심으로 동학을 떠올리도록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충북 역시 동학의 중심지였다는 것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실제로 눈에 보이는 건 별로없고 상상과 이야기만 있을 뿐이고 제대로 안내조차 안되어 잇으니 누구를 탓하기도 그렇다.


이번에는 동학활동의 중심지 충북 보은을 답사하였다.


1. 동학농민운동취회지 - 장내리 유적

보은 장내리는 현재의 행정구역으로 충북 보은군 장안면 장내리 장안마을을 말한다. 이곳 장내는 1885년(고종 22) 6월에 동학의 2대 교주였던 해월 최시형(1827~1898)이 충청감사와 단양군수의 탄압을 피해 단양 ‘송두둑’으로부터 피신해 온 이후 동학교단의 가장 중요한 비밀 포교지가 되었던 곳이다. 이후 1892년 12월 6일에 광화문 복합상소를 위한 도소가 설치되었고, 1893년 3월 11일부터 4월 2일까지 약 20여 일 동안 3만여 동학교도들이 집결하여 돌로 성을 쌓고 보국안민(나랏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과 척왜양창의(일본과 서양세력을 배척하고 일어남)의 기치를 내건 보은집회가 열렸다.

장내리 안내판

장안면사무소에서 속리산 방면으로 가다보면 속리초등학교가 나온다. 그리고 곧 오른편에 동학취회소라는 큰 표지판이 보이는데 그 앞 평지가 바로 보은집회가 열렸던 곳이다. 장내리 입구에는 보은집회를 알리는 안내판이 있고 양옆으로 장승이 서 있다. 100년 전 이곳에서 사회를 변화시키고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며, 그들의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품고 모여들었을 동학교도의 모습은 지금 어디에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지금 이곳은 논으로 변하였고 가축을 키우기 위한 시설들이 있으며 납골당도 보인다. 다만 당시의 모습을 알려주는 것으로 성터의 일부가 동-서 90m, 높이 54~110cm정도 남아 있다. 그러나 관리 상태가 좋지 않아 논을 만들기 위해 돌을 쌓아놓은 것과 구분하기 힘들었다.


나는 이곳에 서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말을 품었던 나무들처럼 주변 산들의 나무가 당시의 함성 소리를 담았을까 귀를 기울여 보았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살고 현재의 삶을 통해 미래를 꿈꾸는 우리들에게 동학농민운동이 주는 메시지는 너무나도 크게 다가왔다.

보은집회가 열렸던 곳 돌성이 보이네요


 2. 종곡리 북실 유적
장내리를 둘러보고 북실마을로 향했다. 북실은 보은읍에서 보청천을 넘어 속리산 방향으로 가면 나오는 마을이다. 북실이란 이름은 안북실 큰마을에 마치 종처럼 보이는 작은 산이 솟아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한자로는 종곡(鍾谷)이라 쓴다. 북실은 1894년 겨울, 동학농민군과 일본군․상주민보군․청주병영군․옥천민보군이 몰려들어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최시형과 손병희(1861~1922)가 이끄는 북접농민군이 크게 패배하여 해산했다. 이곳은 일본군이 중심이 된 진압군이 동학농민군들을 집단 학살한 현장이기도 하다.


1894년(고종 31) 전라도 고부군의 농민항쟁을 계기로 농민의 전면 항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보은 일대에서는 1894년 봄, 전라도에서 1차 봉기가 일어난 후에도 동학교도들이 무장활동을 시작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라도의 남접농민군(동학을 종교적 차원을 넘어 사회 개혁의 중심 세력으로 세우려던 동학 내 세력)이 9월초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을 계기로 재봉기를 하자 교주 최시형은 결국 9월 18일에 봉기하였다.


보은 장내리에는 대도소 건물을 새로 세웠다. 최시형은 출전 준비를 마친 북접농민군(종교적 입장에서 교조신원운동을 주도했던 동학 내 세력)의 지휘권을 손병희에게 맡겼다. 손병희는 10월 23일 출진하여 논산에서 전봉준이 지휘하는 농민군과 합세하였다. 북접농민군의 주력부대가 떠난 후 보은에는 관군과 민보군 그리고 일본군이 차례로 진입하여 동학 도소를 비롯한 근거지를 파괴하였고 동학 지도자들을 처형하였다.

북접농민군은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한 후 순창에서 최시형을 만난 뒤 충청도로 북상하였다. 장거리 행군 끝에 장내리에 도착한 동학농민군은 마을 전체가 불살라진 모습을 보게 되었다. 동학농민군은 즉각 보은 읍내로 들어가 보복을 하고 북실마을로 들어갔다. 이들은 마을 안의 김소촌가(金召村家)에 머물면서 장차 계책을 강구하였다. 이때 일본군은 농민군의 척후병 2명을 발견하였는데, 이들을 통해 농민군의 모습을 알게 되었고 곧바로 공격을 하였다. 무방비 상태에서 추위에 몸을 녹이고 있던 농민군은 일본군과 상주 유격병대의 기습 공격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으며, 눈 덮인 북실 곳곳에는 무자비한 학살이 자행되었다. 교주 최시형과 손병희 등은 가까스로 음성방면으로 도피하였다.


종곡리 북실마을은 동학농민군이 집단 매장된 곳으로 마을 대부분이 유적지라 할 수 있으나 현재 뚜렷하게 남아 있는 관련 유적은 없는 상태이다. 지금의 북실마을은 우리나라의 어디를 가든 만날 수 있는 평범한 마을의 모습을 하고 있다. 들에는 벼들이 금빛을 머금고 알차게 익어가고 있었다.

동학공원

3.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
보은읍에서 속리산으로 가다보면 성족리 일대에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이해를 돕고 기념하기 위해 만든 곳이다. 그러나 실제 이곳은 동학농민혁명의 실질적인 마지막 전투지라고 하는 북실전투지역과 관련성이 없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있다.


주차장에서 기념공원의 중심인 동학농민혁명기념탑으로 가는 길은 작은 개울을 가로질러 만들어 놓은 나무다리를 건너는 것에서 시작된다. 개울에는 무더운 여름이라면 누구나 내려가서 더위를 식히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 있는 맑고 시원한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다리를 건너면 처음 만나는 것은 동학정이라는 국궁장이다. 그런데 국궁이 양반들의 놀이문화에 가깝다고 볼 때, 조선시대 신분제 철폐를 주장했던 농민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한가롭게 활을 쏘고 있는 양반들의 모습은 농민들에게 분노의 대상으로 비춰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하는 곳에 동학농민혁명군을 진압하기 위해 민보군을 만들었던 양반들과 관련 있는 놀이문화를 설치했다는 것은 기념 공원의 취지와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학정을 지나면 너른 민중광장이 나온다. 민중광장은 거대한 돌성 위에 만들어져 있는데, 이것은 장내리에 쌓은 돌성을 의미한다고 한다.


  민중광장에서 위로 보면 산중턱에 기념탑이 있는데 이곳은 갈지(之)자 모양으로 만들어진 나무로 만든 계단을 따라 올라 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 길은 하늘길이라고 불린다. 하늘길을 올라 기념탑으로 가는 길 곳곳에는 동학과 관련된 내용을 소개하는 안내판들이 있어 기념탑으로 올라가면서 동학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을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해 놓았다.


공원을 굽어보고 있는 산 중턱에 위치한 기념탑에는 동학농민군을 형상화한 동상이 있고 그 뒤로 높이 솟아오른 기념탑이 있는데 기념탑의 정상부에는 동학과 관련된 내용을 한자로 새겨놓았다. 기념탑 뒤쪽으로는 병풍을 두른 듯 돌벽을 세워놓고 그곳에 검은색 돌판을 넣어 동학과 관련된 역사적 기록들을 새겨 놓았다.


하늘길 반대쪽으로 빛의 계단이라 이름 붙여진 곳을 따라 내려가면 민중광장 아래로 바위에 동학과 관련된 내용들이 새겨져 있어 동학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만들어 놓았다.


예전에 일본 사회과 교사들이 이곳을 찾아와 안내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일본 사회과 교사들도 김구와 동학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사전에 상당히 많은 공부를 하고 이곳을 답사한 듯 했다. 다른 나라 사람들도 우리 역사를 공부하는데, 정작 우리들은 동학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새삼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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