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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을 주는 모기나라 Dec 12. 2017

아버지의 내리 사랑

아주 짧았던 부자간의 추억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집으로 전화를 자주했다. 전화 통화라고 해봐야 몇마디 짧게 할 뿐이였다. 식사와 건강을 묻고 답하고 애들 간수잘하라는 당부가 고작이였다. 그것도 많이 해봐야 몇일에 한번이였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고향으로 내려왔다. 역에 내려 플랫폼을 빠져나오면 은색의 차가 길모퉁이에 있고 나는 얼른 다른 차에 방해되지 않도록 최대한 신속하게 탔다. 그리고 부자는 간단한 안부만 묻고 말이 없었다. 일하다 말고 작업복 차림에 흙과 똥을 채 털어내지 못하고 서둘러 나를 데리러 온 아버지의 옷차림에 서글픔만 몰려들었다. 아버지에게 표현은 못했지만 양복을 잘 차려입고 집을 나서는 아버지를 나는 자주 봐왔고 멋있다 생각했다. 항상 집밖을 나설 때는 깨끗하게 다니셨고 심지어 목욕탕을 갈때도 늘 깔끔하게 차려입고 나가셨다. 그런 아버지는 아들에게 늘 깨끗한  모습을 하고 직장을 다니라고 신신당부를 하곤 했다


저녁에 고향에 도착하면 어머니를 대신해서 아버지는 이것저것 푸짐하게 저녁밥을 챙겨주셨다. 그 모습이 너무도 낯설고 어색했지만 나는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제 혼자 살아가셔야 하기 때문이며, 한편으로 내리 사랑이기 때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아버지는 나를 위해 삼계탕을 하셨다. 마트에서 재료를 사와 끓여놓고 축사에서 일을 마치고 내가 도착할때쯤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하셨다. 나는 이 삼계탕을 눈물로 먹었지만 내가 먹어 본 삼계탕 중에 제일 맛있었다. 이빨이 아파도 맛있게 나에게 주어진 양을 비웠고 닭국물에 밥까지 말아 먹었다. 아버지는 내가 잘먹는다 생각하고 내가 올때마다 삼계탕을 끓였을 수도 있겠다.


다음 날은 어김없이 목욕탕을 갔다. 때를 밀어주고 받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때만 밀어줄 뿐이여서 어느 순간 나는 때를 밀지 않았다. 목욕을 끝내면 아버지는 믹스커피를 한잔 드셨다. 미안한듯 목욕탕에 준비된 커피를 마시며 세상 이야기를 하신다.  목욕을 오면 비로소 아버지는 대화의 상대가 생긴 것이다. 홀로사는 사람들에게 외로움은 가장 큰 적이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라도 아버지가 활동하는 모습이 좋다. 내가 해주지 못하는 부분을 누군가가 대신해주니 고맙기만 하다. 그리고 그때그때 입맛에 맞게 돼지국밥 장어 오리탕 등을 먹었다. 늘 집밥만 드시는 모습을 보았는데 외식을 이렇게 하는 모습을 보고 자주 사드리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한번은 전어를 먹자고 부산까지 간적이 있다. 나는 뼈있는 회는 좋아하지 않아서 전어는 사실 잘 안먹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원하는 것은 모든 것을 해주고 싶었다. 나는 배부르게 아버지가 시키는대로 전어를 몽땅 비웠다. 배가 터질 것 같았지만 그게 사랑에 보답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저녁에는 쓸쓸히 거실에서 말없이 티비를 보거나 아버지는 축사를 드나드셨다. 예전 같으면 어머니와 함께 드라마를 보시거나 마늘 등을 다듬기도 하는 등 많은 대화를 하시지는 않으셨지만 긴밤을 함께 보내며 삶의 즐거움을 누리셨다. 그러나 이젠 침묵과 어둠만이 남아 아버지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티비를 보다가 시간이 지나면 컴퓨터를 켜서 그동안 배우셨던 내용을 이것저것 하셨다. 일흔이 넘었어도 배움에 대한 열정은 대단하셨다. 그 모습이 낯설었지만 존경의 박수를 쳐 주고 싶었다. 그리곤 잠자리에 들면서 아들에게 일찍 자리고  하셨다. 그때 나란히 누워 속내를 털어놓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어야 했는데 하지를 못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갈 때는 아버지께서는 어머니가 짐을 챙겨주신 것처럼 1년 농사지은 것들을 알뜰살뜰 챙겨주셨다. 어머니가 계시지 않으니 본인이 나서서 챙겨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셨던 것같다. 덕분에 우린 예전처럼 트렁크 가득 짐을 싣고 돌아왔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1년동안이  이때까지 살면서 아버지와 가장 가깝게 의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함께 새벽에 일어나 모기에 뜯기면서 고추를 따고 발고랑에 검은 비닐을 덮고 구멍을 내어 깨를 심었다. 농사일을 하지말라는 자식들의 당부가 있었지만 아버지는 계속 일을 하셨고 나는 힘들어 하시는 것을 알지만 한편으로 그게 또 효도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라도 함께 시간을 보낸 것이 참 다행이다 싶다. 그리고 굳이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같은 공간에 누군가가 함께 있음으로써 느끼는 온기가 있는 것만으로도 아버지는 큰 위안이 되었던 것 같다.


이번 겨울방학때 또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었고 또 더 먼 미래에 가고 싶어 하셨던 미국을 함께 갔을텐데 그러지를 못했다.


이제 외롭지 않게 엄마랑 사이좋게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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