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에서 가장 낮은 산은?
고등학교에서 지리를 가르칠 때가 좋았습니다. 지리 마니아(mania)들이 있어서 저도 더 열심히 연구하고 가르쳤던 기억이 있습니다. 수능 준비에 지치고 힘들어할 때 가끔 실없는 농담을 해도 그냥 좋아해 주었던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참 고맙습니다. '가장 추운 바다는? 썰렁해!, 가장 더운 바다는? 열받아(바다)!, 그렇다면 가장 넓고 깊은 바다는? 사랑해~' 아, '사랑해~'는 최대한 부드럽고 느끼하게 해야 아이들 반응이 커집니다. 특히 여학생들이 정말 싫어합니다. 잠이 확 달아난다고 한바탕 난리를 칩니다. 성공했습니다. 고3 교실에 생기가 돕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은 무엇일까요? 부동산. 그렇다면 가장 낮은 산은 무엇일까요? 힌트는 전 세계에서도 가장 낮은 산입니다. 저출산입니다. 이 웃픈 현실은 어른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세계에서도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진로 수업에서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고 발표할 때 보면 작은 오피스텔 하나에 '냥이'나 '멍뭉이' 데리고 사는 게 꿈이라는 애들이 많습니다. 때론 친한 친구끼리 산다고 합니다. 왜 오피스텔이냐고 물어보면 아파트가 비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월급 모아 집 사기 어렵다는 것을 중학생들도 압니다. 그래서인지 학생들은 '비트코인'과 주식 투자에도 관심이 많고 궁금해합니다.
학교 밖 청소년들이나 대학에 간 제자들과 이야기할 때면 주거 문제가 더 심각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당장 서울에 진학한 학생들은 대부분의 학교가 기숙사가 부족하기에 2학년때부터는 원룸, 오피스텔을 구해야 하는데 높은 주거비 문제로 고민이 많습니다. 진로 과정에서 부딪히는 여러 가지 진로 장벽이나 문제보다 이 주거 문제를 더 큰 장벽으로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부동산 문제는 그 어떤 진로 장벽과 비교도 안 될 만큼 극복할 수 없는 거대한 콘크리트 장벽입니다. 진로에 대한 희망을 집어삼킵니다. 희망 진로를 돈이 되는 진로로 바꾸게 하는 이 거대한 장벽 앞에서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이런 현실을 외면한 채 막연하게 진로 희망과 미래 사회만 얘기할 수밖에 없는 게 참으로 미안하고 마음이 아픕니다.
보수, 진보, 중도, 어느 쪽이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꺾는 정치가 가장 나쁜 정치입니다. 지속 가능한 정치는 현재 세대는 물론 미래 세대의 필요도 충족시키는 정치입니다. 노동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열심히 노력한다면 충분히 자신의 진로에서 먹고살고 행복해질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기본이 작동하는 사회이어야 다음을 기약할 새로운 목적과 목표가 생깁니다. 우리 사회 초저출산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원인에 주목하고 그 원인에 대한 대책을 세우는 게 중요합니다. 문제의 본질보다는 현상에만 초점을 두는 사회, 이런 사회에서 구체적 대안 없이 희망만 이야기하는 것은 희망 고문입니다. 사회 구조의 변화를 합의해야 하고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대안을 마련해 나가야 합니다.
'자살이 많은 나라는 아이를 낳지 않는다.'
"고도성장은 끝났는데 경쟁신화는 왜 여전한가"라는 이관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의 칼럼을(각주: 한겨레 21, 1505호, 2024.3.25.) 읽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1992년에서 2005년까지 자살자가 330% 늘어난 사이에 출생률은 1.76에서 1.08로 줄었다고 합니다. 자살률과 출생률과의 관계를 보여 주면서 학업과 일자리를 둘러싼 경쟁체제가 주요 원인이라고 주장합니다.
자살률이 높은 나라는 출생률도 낮다! 저는 여기에 꽂혀서 이 기사를 표시해 두고 몇 번이나 곱씹어 읽어보았습니다. 학교에서 맞춤형 통합지원팀을 담당하고 있고, 위기관리위원회, 교육복지우선지원사업, 기초학력증진사업 두드림 학교 프로그램을 맡아서 위기 학생 지원 업무를 하고 있기에 평소에 자해나 자살 문제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소규모 학교다 보니 '진로' 빼고 모든 것을 한다고 주변에서 얘기들 합니다. 진로전담교사로서 옆으로만 넓어지는 불안감이 있지만, 우리나라 학생들의 무기력, 자해, 자살이 단순히 개인적 차원에서 기인하는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통계청(www.kostat.go.kr/)에서 '2022년 사망원인 통계 결과'를 찾아보았습니다. 2022년 연령별 5대 사망원인 구성비(단위: 인구 10만 명당 명, %)를 보면 10대의 사망 원인 1위는 고의적 자해(자살)로 42.3%를 차지해서 2위 악성신생물(암)의 12.1%의 3.5배에 달해 압도적으로 높게 나타났습니다. 우리나라의 연령대별 주요 자살 원인을 진로와 직업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10대는 학업과 사회적 기대에 대한 스트레스, 20대는 경제적 불안정과 취업난 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학교 현장에서의 지원과 해결책은 주로 생명존중교육과 정서·심리적, 의료적, 교육 복지적 접근입니다. 청소년은 성장 가능성이 큰 존재이니 그 가능성을 믿고 지원하고 기다리지만 쉽게 해결되지 않거나 나아지지 않는 경우도 많이 보았습니다. 왜일까요? 청소년 자살의 원인은 부모와의 갈등, 우울 등의 정신질환 등 주로 개인적, 가족 환경적 원인이 많다고 교육청 자료는 제시합니다. 그러나 부모, 가족, 학교, 진로와 직업 등 우리의 일상과 사회를 둘러싼 구조적인 원인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청소년기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블랙홀인 학업, 입시, 취업에 대한 극심한 경쟁과 스트레스가 그것입니다. 극심한 경쟁과 스트레스, 장시간 노동이 만연한 사회와 가정환경에서 당연히 양육과 돌봄이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살아가는 부모의 불안과 우울은 자녀들에게도 전염됩니다. 우리의 아이들은 정서·심리적으로 매우 힘든 상황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구조적 원인은 해결되지 않고 더 심화되고 있기에 당연히 청소년 자살 문제가 나아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 거대한 사회구조적 원인이 해결되어야 자살 문제도, 양육 문제도, 출산 문제도 제대로 해결될 것입니다.
칼럼 기사에서는 2003년 이후부터 20년 넘게 자살률 1위의 대한민국은 자살률이 감소하고 있는 OECD 회원국들과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보편적인 경향이 아니라 지극히 한국적인 일이라고 합니다. 자살률이 급격히 높아진 시기는 1997~1998년 외환위기, 2001~2003년 카드 대란, 2008~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시기라고 합니다. 이는 개인적·문화적 요인이 아니라 사회적·경제적 요인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특이한 점은 전체 자살 증가 추세는 꺾였으나, 출생과 직접 관련 있는 10~30대의 자살률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주요 원인은 학업과 일자리를 둘러싼 경쟁체제라고 진단합니다. 그 결과 결혼율과 출산율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기사에서는 사회 안전망인 '공적 복지'는 1990년대 이후 안정적인 임금노동자인 정규직 위주로 더 잘 보호하게 되었고, '공적 복지의 공백'은 부동산 투자 등의 사적 자산 축적 경쟁과 교육 경쟁 심화로 이어졌으며, 대한민국의 교육은 '최상위권 대학과 소수의 좋은 일자리를 향한 경쟁'에 집중되었다고 말합니다. 칼럼에서는 해결책으로 대부분의 다른 일자리에서도 '괜찮은 임금과 산업 안전, 보편적 공적 복지, 사회 안전망'이 보장되어야 하며, 일과 돌봄의 균형, 젠더 불평등 해소 등도 필수적이라고 말합니다.
부모의 스트레스와 우울은 아이들의 것이 됩니다.
인간 존재의 이유를 유전자의 관점에서 설명한 명저 <이기적 유전자>에서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생태학자 데이비드 랙(David Lack)의 이론을 근거로 "개체가 한배 알 수를 조절하는 이유는 전혀 이타적인 것이 아니다. 그들이 산아 제한을 행하는 것은 집단이 이용할 자원의 고갈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기가 낳은 새끼들 중 살아남는 새끼 수를 최대화하기 위해 산아 제한을 실행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느 사회라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경쟁이 없는 사회는 없습니다. 사회적으로 인기 있고 고소득이 보장되는 직업에는 많은 경쟁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생존을 위협할 정도의 과도한 경쟁이 있는 사회, 직업 간 소득격차가 너무 심한 사회, 실패한 노력을 보상해 줄 수 있는 충분한 사회보장제도가 없다면 그 사회는 지속 가능할 수가 없습니다. 부모가 될 사람들은 극심한 경쟁과 스트레스에 빠져 있어 제 하나 보살피고 지키기도 어렵습니다. 그 사회에서는 자신의 생존이 먼저입니다. 그러니 생존하려면 아이를 낳지 않아야 합니다. 낳는다고 하더라도 생존 확률을 높이려면 최소로 낳아야 합니다. 그게 이성적이고 현명한 판단이겠죠. 인간은 이성적 존재입니다. 생존 경쟁이 한계점을 넘어서면 그 힘든 생존 경쟁과 고통을 물려주지 않으려 판단을 하게 됩니다. 어쩌면 이것은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본능적 압박에 의한 것일지로 모릅니다.
장시간 노동, 극심한 경쟁과 스트레스가 만연한 이런 사회 구조에서 가정에서의 양육과 돌봄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이제 사회는 학교에 그 역할과 책임 나누기를 과도하게 요구합니다. 학교는 교육 기관이라는 본연의 모습에서 양육과 돌봄의 공간으로 변해갑니다. 한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서 온 마을이, 온 사회가, 온 지구가 힘을 쏟아야 합니다. 그러나, 각자의 기본적인 역할이 있는데, 자기 본래의 기능과 역할이 지장 받을 정도라면 그것은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요? 가정이 붕괴됩니다. 학교의 역할은 늘어납니다. 교사가 줄어드는 학교에서는 돌봄과 행정 업무는 더 늘어나고 역할은 방만해져 전문성은 옅어집니다. 그 사이 입시 교육은 사교육 시장으로 더욱 빠르게 옮겨 갔고, 그 시장은 더욱 팽창했고, 그 속에 참여하는 사람들 사이의 경쟁도 더 심화되었습니다.
위기관리 업무를 7년째 하면서 관련 자료를 많이 보게 됩니다. 청소년 자살 현황 자료를 보면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로 학교급이 올라갈수록 자살률이 높아지는 경향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눈여겨볼 것은 이런 추세가 학업 중단을 하는 학교 밖 청소년 현황과도 비슷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학교급이 올라갈수록 학업 스트레스와 그로 인한 여러 가지 문제가 심화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해, 자살 등 위기학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학교에서는 자해, 자살 예방을 위한 생명존중교육을 하고, 사안 발생 시 적절히 대처하고 가족 상담, 병원 연계 및 치료비 지원 등 다양한 사업을 하지만 그래도 이 문제는 줄어들지 않고 여전합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근본 원인이 해결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스트레스와 우울은 결국 아이들의 것이 됩니다. 청소년 자살 문제는 청소년기의 충동성과도 관계가 있고 유전적인 요인도 있겠지만 환경적인 요인이 매우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부모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힘든 사회를 살아가야 할 청소년들은 어떤 판단을 할까요?
자살에 대한 해결은 사회학적으로
고도 경쟁 사회, 빈부 격차가 크고 다양성이 없는 사회는 자살률이 높습니다. 자살률이 높은 사회는 출산율도 낮습니다. 출산율이 낮은 사회는 교육의 미래도 없습니다. 부모는 ‘입시’에서 벗어난 다른 선택을 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단일한 ‘입시’에 선택과 집중을 합니다. 성장과 행복을 위한 교육은 사라지고 성공과 생존을 위한 교육만 남습니다. 선택지가 줄어드니 다양성도 없어집니다. 하고 싶은 공부는 못하고 하라는 공부만 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힘이 듭니다. 과거의 성공 경험은 현재의 의무와 실패, 그리고 미래의 불안으로 지워졌습니다. 당장 눈앞에는 과도한 학습 노동만이 남아 있습니다. 재미와 개인적 의미를 추구하는 요즘 세대에게는 삶의 의미와 현재 생활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불합리한 관계, 즉 ‘부조리’의 삶을 살아갑니다. 부모의 기대와 자신을 위해 일단은 하기 싫은 공부이지만 견뎌냅니다. 그러다 임계점을 넘어가면 표현력이 부족한 학생들과 저항이 소용없음을 체감한 학생들은 무기력해지거나 자신을 공격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경제적으로 성장하는 시대에 교사가 되었습니다. 예산이 늘어나니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 해소도 가능해졌고, 그래서 교사도 많이 뽑았겠지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저도 성장의 혜택을 본 세대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저성장 사회입니다. 그러니, 무조건 열심히 하라고만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다른 진로를, 다른 가치를 찾도록 안내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실패한 노력에도 어느 정도의 적절한 보상이 주어지는 안전한 사회 구조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의료 분야 등 특정 분야에 대한 쏠림도 해결될 수 있고, 미래 사회를 선도하는 분야에 더 많은 인재가 유입되고 대한민국의 미래도 있습니다.
학교 밖 청소년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학교를 그만둔다는 것은 '일단은 숨 좀 쉬는 거'라고 합니다. 중하위 성적대의 청소년들은 학교 때의 성적보다는 쉽게 전문대나 4년제 일반대를 갈 수 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고 잘하는 분야를 발견하고 꾸준히 교육과 훈련을 잘 받은 청소년은 그런대로 자신이 원하는 취업에 성공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와 목표만 높을 때는 실패와 좌절의 반복입니다. 학령인구 감소로 과거에 비해 대학 가기는 상대적으로 쉬워졌지만, 결국 모든 것은 취업 시장에서 결판납니다. 보수가 많고 사회보장제도가 잘 작동되는 안정된 정규직 일자리는 많지 않습니다. 쾌적하고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정주 환경은 임금 저축만으로는 마련할 수 없습니다. 소득 대비 너무 비싸고 접근 기회도 많지 않습니다. 모두 극심한 경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대한 벽에 부딪힙니다.
우리 사회의 교육 문제는 교육 내부의 원인도 있지만 사회 구조적 원인으로 발생합니다. 노동의 수요와 공급, 분배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고성장 사회에서는 자유 경쟁은 낙수 효과, 승수 효과가 많지만 저성장 사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나라에서 격차는 계층과 지역, 정규직과 비정규직 문제를 넘어 세대 간의 문제로 확대되었습니다.
대학교에서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에 대해서 읽고 공부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책은 자살의 다양한 유형을 살펴보면서 자살을 통계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사회학적으로 고찰한 명저입니다. 자살의 문제는 개인적, 심리적인 차원이 아닌 사회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도 사회적인 방법으로 가야 됨을 제시했습니다. 우리 사회도 이제 옳고 그름과 다름의 문제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정치는 비윤리가 만연한 위선이 아니라 솔직해질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좋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자살, 출산, 양육, 교육, 일자리의 문제는 이제 통합적으로, 사회학적으로 살펴보고 해결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육의 미래가 있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요? 경제적 자원의 불평등한 분배와 이로 인한 갈등과 변동이 사회의 발생, 유지에 기여한다고 보는 갈등론적 관점이든, 사회는 유기체와 같아서 구성 요소들은 상호 의존 관계에 있으며 사회 전체의 유지와 통합에 필요한 기능을 분담한다고 보는 기능론적 관점이든, 사람이 살지 못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사회, 그것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자살률 독보적 1위 국가라면 그런 사회는 잘못 만들어진 사회 아닌가요? 그런 사회를 만들고, 그런 사회를 살아가라고 우리 아이들의 등을 떠미는, 우리는 참 나쁜 어른들입니다.
정의란 무엇인가요? '각자에게 적절한 것을 주는 것이라'는 아리스토렐레스의 관점이든, 인간 존중과 도덕적 의무를 강조한 칸트의 관점이든,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적 관점이든, 개인의 권리와 의무 그리고 사회적 자원의 공정한 분배를 강조하는 사회적 관점이든, 이를 지키기 위한 법률적 관점이든, 인권, 생태, 경제적 불평등 등 다양한 문제에 대한 현대적 접근이든, 개인의 자율과 도덕적 책임에만 맡기기에는 너무나 많은 자살자가 생기는 사회라면 그런 사회는 정의가 없는 사회가 아닌가요? 최악의 사회가 아닌가요?
자살 문제가 우리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무너뜨릴 만큼 심각하지만 드러내 놓기를 주저합니다. 국정의 주요 과제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불편한 진실로 여깁니다. 사회적으로 집단 인지 부조화 상태입니다. 인정하지 않습니다. 정보를 차단합니다. 해당 부처와 부서에서만 다룹니다. 드러내어 말하지 아니하고 뒤에서 자꾸 은밀히 감춥니다. 그게 대한민국의 민낯입니다. 학교도 사회도 수월성 중심의 교육 프레임은 변하지 않습니다.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대단한 전문가도 아니고 그런 체제에 순응하고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이지만, 어쩌면 이런 문제를 방조한 공범이지만, 이제는 정말 달라져야 하겠다고 마음먹었기에 저부터 용기 내어 이야기합니다.
폭풍우를 만나 부서지거나 뒤집힌 난파선에서 한 명이라도 더 살릴 수만 있다면, 한 명이라도 더 희망을 줄 수 있다면, 스스로 꿈을 찾아 한 뼘이라도 더 나아가게 도울 수 있다면, 그게 제가 여기에 있는 하나의 이유입니다. 학교 안이든 학교 밖이든 아이들이 힘든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학교 밖 청소년들은 보통의 아이들과 똑같습니다. 다만 약간의 선택이 다를 뿐입니다. 간혹 많은 도움이 필요한 경우가 있을 뿐입니다. 그뿐입니다. 그러니 차별과 배제, 색안경을 쓴 시선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학교 안이든 학교 밖이든 모두가 꿈꾸고 행복해질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되도록 어른들이 조금 더 큰 결심을 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다시 시작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희망은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점심시간에 와야 할 학생이 오지 않았습니다. 운동장에서 열심히 축구를 하고 있습니다. 3학년이라 아침에 상담 쪽지를 주었는데 어제에 이어 오늘도 오지 않습니다. 진짜 축구가 좋거나 아니면 오기 싫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축구가 정말 좋아서 그쪽으로 진로를 개척하는 과정일 수도 있고, 아니면 낮은 성적과 인지부조화 때문에 입시 정보를 차단하고 싶을 수도 있겠지요. 청소년은 신체, 사고, 정서가 동시에 균형 있게 성장해야 합니다. 어쨌든 열심히 운동하고 있으니 어느 하나는 제대로 성장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럼 되었습니다. 진로상담은 내담자의 호소 문제도 다루어야 하지만 발달 단계에 따라 적절한 코칭도 해야 합니다. 저는 신호를 보내는 사람입니다. 미워하지 않기로, 가볍게 긍정 신호를 보내기로, 자존감과 자신감을 살려 주기로, 자신의 강점을 찾도록 도와주기로 마음먹고 운동장으로 나가 봅니다. 관심을 표현하고 축구 경기를 응원합니다. 그리고 다음 편한 시간을 잡아 만날 약속을 합니다.
원래 재능이 없는 사람들이 입시 공부에만 매달리는 겁니다. 공부에는 다양한 종류의 배움이 있습니다. 전 과목을 또는 국영수사나 국영수과만 잘해야 하는 공부가 아닌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계발하는 공부가 진짜 공부입니다. 진짜 공부는 입시 공부를 더 잘하게 합니다. 진짜 공부는 재미있고 의미 있고 행복하게 합니다. 진짜 공부는 진로와 직업을 지속 가능하게 합니다. 진짜 공부는 '대기만성'을 이루게 합니다. 그런 공부가 있다는 것도 알려 주어야 합니다. 인간은 원래 호기심이 많은 존재입니다. 배움의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의 공부는 진로가 인기가 있는가, 돈이 되는가와 너무 결부되기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공부 상처를 어루만지고 낫도록 도와주고, 자신의 특성에 적합한 그리고 자신의 강점을 계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려고 합니다. 제 도움이 효과를 보려면 이를 뒷받침해 줄 그런 사회 환경도 같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 사회는 바뀌어야 합니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현세대가 미래 세대에게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 생존의 전제조건은 희망입니다. 아이들에게서 생존은 희망이 동시에 주어져야 더욱 가능해집니다. 아이들은 미래를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가 우리 아이들에게 해줘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학교와 가정에서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합니다. 현재의 생존을 위해 여러 도움이 주어야 합니다. 관심, 위로, 공감, 칭찬, 응원,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힘들어 죽고 싶더라고 그래도 살아남아야 한다. 그래야 언젠가는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으니까. 그래야 다른 길도 찾을 수 있으니까. 희망을 찾을 수 없다면 그때는 만들어 가야 한다. 희망은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것을 가르쳐 주려고 합니다. 그래서, 학생들의 메시지를 듣고 또다시 신호를 보내는 것입니다. 여기 사람이 살고 있다고, 살아있는 한 언제나 희망이 있다고, 인간은 성장하는 존재라고, 같이 노력해 보자고, 괜찮아! 다 잘 될 거라고···
상담은 지극히 개별화된 해결책입니다. 개인의 문제를 마주 보게 하고, 해답을 찾도록 도움을 줍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해결책이라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내담자가 건강하게 잘 성장해서 행복하게 잘 살고, 또 언젠가는 더 큰 사회적 가치도 알게 되어 사회에도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사회는 공동체에 협력하는 사회이고, 나눔과 배려가 윤리뿐만 아니라 사회시스템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사회를 위해 좋은 사회적 합의도 만들어 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여기에 있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합니다.
[참고 자료]
한겨레 21, 1505호, 2024.3.25.
이기적 유전자, 리처드 도킨슨, 을유문화사, 2023.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와이즈베리,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