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퍼컷
의뢰인의 표정이 묘하다.
'좀 전 회의에서 통역이 좀 좋지 않았나?'
'계약서 번역이 좀 좋지 않았나?'
'어째 이런저런 마음에 안 드셨나?'
의뢰인과 함께 일을 하다 보면, 개인적인 성향도 있겠지만 어쨌든 의뢰인의 표정을 아주 무시할 수 없다, 난.
"이제 계약이 다음 주까지인데, 제 통번역 서비스가... 어떻게 만족하셨는지요?"
이런 질문을 하는 스스로가 상쾌하지 않다, 볼품없다.
"예, 정말 도움이 필요했는데, 짧은 기간이었지만 정말, 정말, 많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우선은 다행이다. 그러나 먹고사는 문제는 만족했다고 해결될 만큼 단순하지 않다. 살아내야 함은 최우선순위다. 이 앞에서 거의 모든 고상한 개념은, 대부분의 이들에게 신기루가 된다. 나도 늘 예외는 아니다.
"이 프로젝트가... 앞으로도... 계속되나요?"
의뢰인은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이다. 속도 깊다.
"아, 예. 일단 연말까지 진행되고 상황에 따라 2-3년 더 계속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한 명 구했습니다. 그런데, 하나 여쭤보아도 될까요?"
익숙한 실망감과 우울감이 마음속에서 피어오른다. 한 십 초 버티면 없어지는. 그런데, 뭘 물어보려는 거지?
"아, 예."
"왜, 아무개 통역사님은 조직에 안 계시고 이렇게 프리랜서로 일하시나요?"
뭘 묻는 건지 모르겠다. 아니 생각하고 싶지 않은 심경이었다. 볼품없지만 어쩌겠나 난 토라져 있었다, 스스로에게.
'그래, 일을 아주 잘해도 게임이 안돼. 통역은 이제 포기해야겠다. 이젠 아무렇지도 않을 때도 되었는데...'
객관적인 상황과는 전혀 상관없이 늘 한 편에 똬리를 틀고 있는, 스스로 키우고 있는 근거 없는 자격지심 때문일 테다. 난 늘 연습한 대로 의뢰인에게 최대한 정중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예. 이런저런 사정이 이러저러해서 이렇게 소속하지 않고서 일하고 있네요."
"아, 예. 알겠습니다."
무엇이 전해지고 의뢰인은 어떻게 이해했는지, 난 무관심해져 있었다, 이미. 왜냐하면, 그래야 다음 의뢰인에게 최선을 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토라짐 비슷한 감정이 아예 없지 않았으나 늘 연습하였듯이 타당한 거리를 두어야 할 상황이라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
일과를 마친 후에 평소보다 더 천천히 걸어 집으로 향했다. 운동도 할 겸 교통비라도 아껴 볼 요량으로 한 시간 정도의 거리를 걸어 다니고 있었다. 집까지 가는 길에 깔린 보도블록의 개수를 얼추 다 셀 수 있었다, 이 날은.
"다녀왔어요."
"어, 여보.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아내는 귀신이다. 무서울 때도 있고 성가실? 때도 있으나 난 귀신인 아내가 좋다. 어느 누구에게도 다 하지 못한 말을 난 귀신에게 홀려서 다 자백하고 쏟아낸다. 귀찮아 할 수도 있을 텐데 이 귀신분은 희귀한 부류인 따뜻한 귀신이다. 홀린 자의 이야기를 싹 다 듣는다. 혹시 모른다. 홀린 자의 혼이 아니라 홀린 자의 햇이야기를 먹이?로 삼는 부류일지도. 신들린 듯 홀려서 난 아내에게 따끈따끈한 그날의 이야기와 감춘 심경을 탈탈 털어서 내어놓았다.
"그래, 속상하겠네. 일단 늦었으니 저녁 먹어요."
아내는 이 한마디로 언제나 마무리를 지어준다. 아직 제정신이 아닌 난, 그 한마디로 언제나 고분고분해진다. 이런 일이 사실 극히 내향적이고 민감한 통역사인 나에겐 종종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통 이런 에피소드는 늘 여기서 마무리된다. 그런데,
"아빠, 제 생각인데요. 그 아저씨분이 아빠가 너무 잘해서, 그래서 그렇게 물어본 거 아닌가?"
이야기를 들었는지 딸아이가 뜬금없이 불쑥 들어온다.
"???"
"그래? 왜,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
"그 아저씨가, 아빠가 너무 잘하니까 회사 같은데 있어야 하는데, 프리랜서니까, 궁금해서 물어본 것 같은데. 그러니까, 아빠 기분 나빠하지 않아도 되지 않나! 반대로 아빠, 기분 좋아해야 되지 않아."
"그래...??? 고마워. 아빠, 또 힘낼게. 걱정하지 마."
제대로 얻어맞아 얼얼한 느낌이었다. 사실, 아이의 이야기가 그 자리에서 바로 수긍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반박할 수 있는 논리적인 이유가 없음을, 곱씹을수록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의 말이 맞을 가능성이 내 상한 기분보다 백에 가깝도록 높았다.
한편으론 자괴감이 들기도 했으나, 뿌듯함과 흐뭇함이 훨씬 더 강했다. 아이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는지 사실 난, 모른다. 귀신분일 수도 있다, 확실하진 않으나. 진실은 모르겠다. 어쨌거나 삶이 참 신기하다 싶었다, 이 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