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주의 타파하기 #1

동굴라이프

by Frank Lee Speaking

작년 이 맘 때쯤 ADHD 진단을 받았다. 가족력의 영향이 크다고 한다. 인구의 4% 정도는 ADHD라고 한다. 우리가 원시인이던 시절에는 ADHD의 산만한 정신 상태와 충동성이 생존에 유리하게 작용했을 거라는 가설도 있던데, 지금은 늘 주위를 경계할 일도 사냥감에 돌발적으로 뛰어들어야 할 일도 없다. 산만한 정신세계는 예술성, 창조성의 원천과 그 맥이 어느 정도 닿아있다는 말에는 동의한다. 그 맥을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장소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대학을 나왔고 안정적인 직장을 구했다. 생존 문제는 한숨 놓은 것 같다. 이렇게 쭉 살아도 큰 문제는 없겠다 싶었다. 들쑥날쑥한 감정 기복만 빼면. 내 일생에 가장 큰 숙제는 항상 나 자신이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어떻게 풀어야 할지 갈피조차 잡을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큰 난제. 부모에게도 어려운 자식이었고 가까운 친구나 선생님들, 직장 동료들에게도 어려운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가장 어려운 사람이었다. 스스로의 눈치를 보는 기분이라고 설명하면 적당하겠다. 기본적인 정서는 우울감이었고 누구든 내 주위에 있으면 그 그늘에 잠식당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사람과의 거리가 편했다.


기분 좋게 도로를 달리다가 불현듯 표지판을 스쳐 지나면 불안이 엄습한다. 뭐라고 쓰여 있었더라? 읽어보려고, 기억해 내려고 애써 보아도 무용지물이다. 그 표지판을 지나고 나면 짧게는 1주, 길게는 수개월 간 우울한 사람이 된다는 건 확실하다. 다시 동굴로 들어갈 시간이구나, 하면서 주섬주섬 채비를 한다. 잡혀있던 약속을 미룰 핑계를 구상하고, 곧 어질러질 집을 마지막으로 청소하고, 중요한 결정은 뒤로 미룬다. 이런 사람으로 30여 년을 살며 생긴 노하우라면, 동굴 속에 있을 때는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을 내리지 않는 게 낫다는 사실이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내 주위에 누가 오고 가는지, 내 입으로 무엇이 들어가는지 아무것에도 진심을 기울이지 못한 채 내면에 침잠해 있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그 생각은 동굴이 끝나감을 알리는 이정표다. 이정표에는 매 번 똑같은 글귀가 쓰여있다. '대체 뭐가 문제였더라? 내가 이걸 문제 삼는다는 사실을 빼면 말이다'. 그래서 결국 문제는 없고, 문제라고 생각해 사로잡혀 있던 내 생각이 문제였다는 뻔한 사실을 깨달으며 N번째 동굴 생활은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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