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박가 Aug 28. 2024

김치 국물을 마셨다

  학교에서 육상 선수의 대우는 달랐다. 운동장을 주인처럼 사용했고, 무려 빵과 우유를 간식으로 받았다. 도 대회에 나가는 날이면 교장 선생님까지 나와서 배웅할 정도였다. 육상부는 하교 후에 달리기 훈련을 받고 갔다. 내 동생도 달리기를 잘했다. 학교 대표로 육상대회도 자주 나갔다.


  그 무렵 난 혼자 집에 가는 게 무서웠다. 단짝 영화를 시작으로 4학년 때 정숙이마저 대전으로 이사가고는 외톨이가 되었다. 집에 같이 갈 친구가 없어졌다. 그래서 동생과 서로 기다려주며 집에 같이 돌아오곤 했다. 동생과 같은 육상부인 선희도 함께 갔다.


  동생보다 한 살 많은 선희는 특출나게 달리기를 잘했다. 도 대표가 된 적도 많았다. 우리 학교에서 내 동생보다 달리기를 잘하는 유일한 아이였다. 그날도 동생과 선희의 육상 연습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육상부 선생님이 출장을 가셔서 하필 간식이 나오지 않았다. 나눠 먹는 빵과 우유는 꿀맛이었는데 아쉬운 마음을 삼키고 교문을 나섰다. 그날따라 우리 셋은 유난히 배가 고팠다. 천천히 걸어가다가 결국 신촌 다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우리는 도시락을 꺼내 보기로 했다. 밥이 두 숟가락씩은 남았다. 반찬은 없었다. 그나마 김치 국물이 조금 남아있었다. 밥 한 숟가락을 입에 넣고, 김치 국물을 동생이 먼저 한 입, 그리고 나도 한 입, 마지막으로 선희가 반찬 통을 바짝 기울여 마셨다. 국물이 거의  남지 않았는지 선희의 고개가 계속 바깥쪽으로 꺾여갔다.


  그때였다. 갑자기 철퍼덕 소리가 나더니 선희가 보이지 않았다. 다리 아래로 떨어진 것이었다. 고개를 높이 쳐들다가 중심을 못 잡았나 보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당황스러웠다. 우리는 옆에 난 ‘쪽길’을 통해 다리 아래로 재빨리 내려갔다. 다리 아래에는 물은 거의 없고, 작은 자갈들이 깔려있었다. 선희는 놀란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앉아있었다. 괜찮나 살펴봐도 어떤지 잘 알 수 없었다. 다행히 피는 나지 않았다. 선희는 괜찮다면서도 팔이 살짝 아프다고 했다.


  한쪽 팔을 감싸 안은 선희를 동생과 내가 끌어주고 밀어주다시피 하여 다리 위로 겨우 올라왔다. 나는 도시락통을 이럭저럭 챙겼다. 동생이 선희를 옆에서 호위하고 나는 선희의 가방을 맡았다. 그날따라 동네로 들어가는 차가 한 대도 없었다. 우리는 선희에게 괜찮은지 계속 물어보면서 집으로 향했다. 선희는 그리 아픈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찡그린 인상을 펴지 못했다. 우리는 걱정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반고개째를 넘고 강골 밭을 지나 목소교회가 보였다. 드디어 ‘도랜말’에 다 온 것이었다. 도랜말의 파란 대문 앞에서 선희가 잘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우리도 집으로 향했다. 정신 차리고 보니 김치 국물이 티셔츠에 튀어 있었다. 선희가 떨어지기 전에 흘렸나 보았다. 다리에서 떨어지는 거에 비하면 그까짓 거 아무것도 아니었다.


  괜찮다고는 했지만, 선희가 계속 걱정되었다. 그러다가 다리에서 떨어진 선희를 생각하니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조금 전까지는 정신이 없어서 별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상황이 너무 어이없었다. 선희 언니가 아프다는데 웃음이 나냐던 동생이 더 크게 웃기 시작했다. 우리는 배꼽이 빠질 듯 웃다가 나중에는 눈물까지 흘리며 웃었다.


  다음 날 선희는 팔에 석고붕대를 하고 나타났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