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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박가 Aug 14. 2024

거짓말을 잡아내는 보리차

추운 겨울이었다

  추운 겨울이었다. 학급마다 난로를 피웠다. 가운데가 뻥 뚫려있는 구멍탄을 태웠다. 난로 주위에는 안전을 위해 사각철망이 쳐 있었다. 교무실에 온장고가 생기기 전까지 양은 도시락을 난로 위에 차곡차곡 포개 점심때까지 데웠다. 점심시간이 지나면 노란 주전자를 올렸다. 주전자 주둥이 구멍에서 모락모락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겨울이면 교실에서 늘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내가 2학년이던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춥게 느껴졌다. 허허벌판 등굣길을 강풍과 맞서 싸워 가다 보면 온몸이 꼿꼿이 굳어가는 듯했다. 겨우 교실에 들어가면  언 얼굴과 손이 풀리면서 열이 올라왔다. 난로 가까이에 앉으면 안과 밖의 온도차로 정신까지 몽롱해지곤 했다.


  그날도 노곤노곤해지는 정신을 어쩌지 못하고 흐물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곧 날벼락이 떨어졌다. 우리 반 한 아이의 돈이 없어졌다고 난리가 났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점심때까지 훔쳐간 아이는 자수하라고 말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작은 웅성거림은 있었지만 다른 날보다 조용한 가운데 밥을 먹었다.


   5교시가 되었다. 선생님은 아무도 자수를 하지 않아 특단의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했다. 난로 위 주전자에 무언가를 넣으셨다. 거짓말을 가려내는 보리차라고 했다. 그  물을 마시면 거짓말한 사람의 얼굴색이 변한다며 다른 사람은 알아보기 어려워도 선생님은 단번에 알아볼 수 있다고 했다.


  반마다 구비돼 있던 갈색 유리컵에 그 물을 따라 한 사람씩 마시게 했다.  몇 분 지나면 거짓말한 사람의 얼굴색이 변할 거라며 모두 눈을 감으라 했다. 바짝 긴장한 가운데 꽤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선생님은 자수하면 용서해 주겠다며 범인은 손을 들라고 다시 말했다. 그러나 적막만 흐를 뿐이었다. 눈을 감고 있으니 답답했다. 혹시 전에 했던 거짓말 때문에 내 얼굴색이 변하면 어쩌나 쓸데없는 걱정이 되었다.


  적막은 계속되었다. 돈을 훔치지 않았는데 내 얼굴색이 변해 억울하게 뒤집어쓰면 어쩌나 점점 더 마음이 떨려왔다. 제발 범인이 자백해 주기를 바랐다. 내 자리는 난로 옆이었다. 난로 열기로 얼굴이 발갛게 익어가는 것 같았다. 혹시 이걸로 오해받으면 어쩌나 괜한 걱정이 더해졌다.


   온 세상이 멈춰있는 것 같은 침묵 속에 선생님이 눈을 뜨라고 했다. 떨림과 걱정 속에서도 시간이 흐르긴 한 모양이었다. 범인을 알아냈다고 했다. 갑자기 환한 세상이 열리며 눈이 부셨다. 학교가 끝날 때까지 혹시 내 얼굴색이 변한 건 아니었을지 불안한 마음으로 선생님을 살폈다.  다행히 나는 누명 쓰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누가 범인일지 반 아이들을 하나씩 살피며 머릿속으로 추리해 나갔다. 추리할수록 용의자는 늘어났고 결국에는 범인 찾기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한동안  거짓말과 보리차를 멀리하게 되었다. 그 겨울은 지독히도 추웠던 걸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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