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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박가 Aug 07. 2024

열두 살의 가을

가을이 싫었다


  가을이 싫었다. 산이 붉게 물들고, 하늘이 높아지든 말든 우리는 콩 타작을 하고, 배추를 뽑고, 고구마를 캤다. 허리 펼 새 없이 논바닥의 피를 뽑다 보면 어느샌가 논 앞 언덕배기에서 사촌 오빠가 넋 놓고 가을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팔자 좋게 앉아있는 오빠가 얄미웠다. 가을은 우리에게 그저 노동의 계절일 뿐이었다.


  그날은 태풍이 온다는 예보가 있었다. 언니가 6학년, 나는 5학년이었다. 3학년, 2학년 동생들과 넷이서 함께 조퇴하고 집에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집안의 농사일을 도우려 조퇴까지 하고 가는 게 너무나 창피했다. 학교 앞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지도 못하고 빙 돌아 학교 뒤편 창고 앞에서 만나 네 자매가 함께 교문을 나섰다.


  마침 수업 시간이라 개미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고 조용했는데 그게 더 내 마음을 주눅 들게 했다. 가을 태풍은 우리 집에만 오는 건지 조퇴하는 아이들은 우리밖에 없었다. 학교에서 500미터쯤 떨어진 신촌 입구에 들어설 때까지 들에서 일하고 있던 어른들의 의아한 눈빛에 왠지 우리가 구경거리가 된 것 같아 얼굴을 들고 가기 민망했다. 그 와중에 동생들은 뭐가 좋은지 계속 시시덕거렸다.


  학교에서 집까지 중간쯤 되는 반고개째 고개에 오르고서야 주변을 의식하지 않게 되었다. 고개를 내려가면서 왠지 억울한 마음에 울컥하기도 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아버지의 경운기에 올라타고 우리는 부엉김이 논으로 향했다. 나는 수업이 끝나지도 않은 우리를 불러낸 아버지가 못마땅해서 입이 부루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일손이 없었으면 초등학교 아이들까지 다 불러냈을까 싶지만, 그때 나는 열두 살의 부끄러움 많고 욕심 많은 아이일 뿐이었다.


  우리 집은 소를 키웠는데, 짚단은 겨우내 소밥이 되었기에 우리의 밥줄이나 다름없었다. 집 천장이 뜯겨 나가는 것보다 우리에겐 짚을 사수하는 일이 더 중요했다. 그래도 조퇴까지 해가며 일손을 도와야 하는 게 자꾸만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집은 왜 늘 일이 이렇게나 많은 건지, 다른 부모님들은 아이들의 학교생활을 최우선으로 두는데 우리는 왜 맨날 먹고사는 일에만 신경 써야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 집 사정을 잘 알면서도 그걸 다 이해하며 받아들이기에 나는 너무 어렸다. 내 속도 모르고 동생들은 수업하기 싫었는데 잘됐다고 좋아했다.


   어느새 논에 도착하니 바닥에 널브러진 짚단들과 함께 대충 쌓아 올린 짚단 무더기가 위태롭게 산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아버지의 지휘 아래 빼곡하게 짚단을 다시 쌓아 올렸다. 언니와 나는 한꺼번에 두세 묶음씩 짚단을 날랐고 동생들은 하나씩 날랐다. 짚단이 단단한 사각기둥 꼴을 만들며 높아져 갔다. 아버지의 키보다 높은 짚단 무더기에 모두 매달려 비닐을 씌우고, 아래쪽으로는 눈과 비가 새어 들어가지 못하도록 비닐 위로 흙을 파 올려 꽁꽁 싸맸다. 그리고는 논 주변의 큰 돌들을 주워 와서 그 위에 올렸다. 특별한 기술이랄 것도 없이 나르고 쌓으면 그만이었다.


  얼추 짚단 쌓아 올리기를 끝내고 집에 돌아와서 늦은 저녁을 먹은 후 잠이 들었다. 다음날 학교에 갔을 때 친구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선생님도 아무 말씀 없으셨지만 나는 괜한 눈치를 보며 전날의 조퇴를 부끄럽게 여겼다. 그때 우리 반에는 선생님이 무서워서 학교에 안 오겠다고 산으로 도망가는 친구도 있었는데 나는 그런 아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에게 학교는 일로부터 해방되는 공간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을 산과 황금 들녘이 생의 공간에서 감상의 공간으로 바뀐 건 내가 마흔을 넘기면서부터였다. 아이들이 조금 자라고 나니 아파트 단지 내 나무들과 반석 천의 갈대 무리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바람에 흔들리며 잎을 떨구어 내는 나무가, 햇빛에 반짝거리는 갈대들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이렇게 설렘 가득한 가을에 흠뻑 취해있다가도 태풍 소식이 들려오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농부들이 가장 걱정된다. 그리곤 잔뜩 굳은 마음으로 짚단을 쌓아 올리던 열두 살의 아이가 안쓰럽게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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