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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박가 Jul 24. 2024

그날의 단상2

 그날은 ‘금산 인삼제’에 갔다가 늦게 돌아온 날이었다. 식구들은 다 일을 하러 가고 집에 없었다. 대문에 들어서려는 찰나 뜰에서 뒷집 언니가 노란 바가지 가득 뭔가를 채워 들고 뒤꼍으로 나가는 게 보였다. 우리 뒷집에는 육촌 오빠가 살았다. 우리는 큰 아버지뻘 되는 육촌 오빠를 ‘뒷집 오빠’라 불렀고, 오빠 부인을 ‘뒷집 언니’라고 불렀다. 그 무렵 무서운 돌풍을 동반한 큰비로 뒷집 언니네와 우리 집의 경계였던 담벼락이 무너져 버렸다. 다들 가을 들일이 바빠서 손볼 엄두도 못 냈다.


  뒷집 언니가 담벼락 너머로 담아간 게 뭔지 궁금했다. 뜰 가까이 가서 봤더니 함지박에 들깨가 가득 담겨있었다. 어머니가 수확한 들깨를 까불리기 전에 그리 내놓으셨던 모양이었다. 집에 아무도 없을 때 깨를 들고 간 그 언니가 이해되지 않았다. 급한 일이 있었던 걸까?


  일손을 거들러 들로 나갈까 하다 생각해 보니 가족들이 곧 저녁을 먹으러 집에 돌아올 시간이었다. 불 꺼진 방에 혼자 들어가는 것도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마당을 서성이며 다리로 나갈까 하던 참에 아버지의 경운기 소리가 들렸다.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 마음에 대문으로 나가 가족 맞을 준비를 했다.


  집에 오자마자 어머니는 저녁준비를 하셨다. 아버지는 개밥과 소밥을 챙기셨다. 언니는 팔다리를 씻었고 마루 한편에서는 동생들이 장난을 치고 있었다. 곧 저녁상이 들어왔다. 우리는 달려들어 밥을 먹었다. 나는 ‘금산 인삼제’ 이야기를 했고, 언니와 동생들은 내가 생전 일이라고는 해본 적 없는 것처럼 자신들이 하루 종일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세세하게 늘어놓았다. 한 귀로 대충 흘려듣다가 뒷집 언니가 깨를 가져간 게 생각났다.     

“엄마, 아까 뒷집 언니가 깨를 빌려 갔어요.”

“무슨 깨를?”

“우리 뜰팡 함지박에 있는 깨요. 한 바가지 가득 퍼가던데요?”

“너 언제 봤어?”     


  갑자기 아버지와 어머니가 심각해지셨다. 나는 본 대로 두 분께 말씀드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뒷집 언니가 우리 깨를 훔쳐간 거였다. 내 목격담 이후로 어른들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뒷집 언니는 그런 적 없다고 잡아뗐다. 큰어머니는 한 술 더 떠 ‘쟤’가 제대로 본 거 맞냐며 뒷집 언니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큰어머니는 늘 가족인 어머니보다 뒷집 언니와 친하게 지내셨다. 나를 믿지 못하고 뒷집 언니 편을 드는 큰어머니가 야속하기만 했다.


  어느새 이 일은 진실게임으로 번지고 있었다. 어머니 아버지는 다시 나에게 확인을 하셨다. 나는 왠지 두려웠지만 내가 본 그대로를 천천히 다 말씀드렸다. 부모님은 나를 믿으셨다. 그 당시 나는 없는 얘기를 지어낼 만큼 맹랑한 아이는 아니었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었지만 발뺌하던 뒷집 언니가 결국 자신이 한 일을 인정하고 사과하면서 그 일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나는 후에 뒷집 언니를 만날 때마다 괜히 내가 죄지은 양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되고 아이를 낳고 나서야 뒷집 언니를 피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서로 마주치면 웃으며 인사하는 배짱도 생겼다. 그러나 나는 웃는 그 언니의 얼굴 이면에 어떤 마음이 숨어 있을지 늘 서늘하게 궁금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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