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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박가 Jul 17. 2024

고추 따기

그 여름날

  일이 많았던 어느 여름날, 셋째 동생과 둘이서 진골로 고추를 따러 갔다. 나는 세상에서 고추 따기가 가장 싫었다. 고춧잎 뒤에 ‘빼백하게’ 붙은 초록 진딧물이 너무 징그러웠고, 허리를 계속 숙이며 일하는 것도 힘들었다. 고추를 따며 채워지는 비료 포대를 옆으로 옮겨가는 것도 무거웠고, 다 찬 포대를 큰 자루에 쏟아붓는 것도 힘겨웠다. 한 고랑을 그렇게 허리 아파가며 따는데 한 시간도 넘게 걸리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매번 반나절 ‘이늉이늉’ 따고 놀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종일 따도 진골에 있는 고추를 다 딸 수 없다는 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시작도 전에 일할 의욕이 사라졌다. 어두워져 빨간 고추가 보이지 않으면 집에 돌아갈 테니 그때까지 대충 따다가 시간이나 때우자는 심산이 컸다. 그렇다고 대 놓고 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루와 비료 포대를 챙겨 동생과 집을 나섰다. 찌는 듯한 더위에 일할 생각을 하니 진골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황소둠벙에서 수영하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잠깐 물에 들어갔다 갈까 하는 유혹을 뿌리치고 경운기 바퀴 흔적으로 움푹 팬 길을 따라 걸었다. 가운데는 바퀴에 눌리지 않아 풀이 무성했다. 턱턱 진골에 도착하니 감나무 아래만 그늘이었다.


  고추밭 끝 쪽은 산그늘이 내려와 있었지만 풀이 무성해서 그나마 감나무 아래가 쉬어가기에 좋았다. 그곳에는 고추 말뚝이 너저분하게 쌓여 있었다.  말뚝 몇 개를 바닥에 대충 깔고 그 위에 앉았다. 시작해야 하는데 한숨부터 나왔다. 물이라도 떠 온다는 게 항상 밭에 와서야 그냥 왔다는 걸 알아차렸다. 매미는 계속 맴맴 울었다. 감나무 위를 올려다봐도 어디에 붙어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동생이랑 무거워진 엉덩이를 겨우 들고일어나 고추밭으로 들어갔다. 이상하게 진골 고추밭엔 진딧물이 더 많은 것 같았다. 고랑 사이로 들어가자 숨이 턱 막혔다. 고추밭 비닐에 햇빛이 반사돼 눈도 따가웠다. 억지로 무념무상에 빠진 채 고추 따기에 돌입했다. 빨갛게 잘 익은 것만 골라 따야 했다. 어쩌다 보면 초록색 고추도 따게 됐다. 그 고추도 일단 포대에 같이 담았다. 집에서 말릴 때 가려낼 터였다.


  손등과 팔뚝에 줄기가 스쳐 상처가 나기도 했다. 힘주어 고추를 홱 낚아챈다는 게 그만 초록 고추들이 주렁주렁 달린 가지를 꺾어낼 때도 있었다. 그런 것들은 가지런히 비닐 위에 펼쳐 뒀다. 다음번에 따러오면 그땐 잘 익어있을 터였다. 동생 포대가 내 것보다 차지 않았는데 저만큼 앞서가 있었다.


“너 잘 따는 거 맞아?”


“어.”


왠지 미심쩍었다.


“제대로 안 따면 다음에 두 배로 따야 돼. 똑바로 해.”


“알았어. 제대로 하고 있다니깐.”


  이럴 때 어머니가 있으면 좋았을 텐데. 어머니는 늘 손이 빨라 한 골을 가장 먼저 따고는 우리 골 끝에서부터 도와주셨다. 어머니가 합류하는 순간 마법처럼 한 골이 쉬이 끝났다.


  햇빛과 땀과 진딧물과 싸우다 보니 어느새 포대 하나가 다 찼다. 반쯤 찼을 때 포대를 옮겨야 수월했을 텐데 무거워서 옮길 일이 걱정이었다. 동생과 같이 들어서 감나무 아래 자루에 붓기로 했다. 둘이 앉아서 아래부터 포대를 들어 올렸다. 중간에 앉았다 일어서는 게 더 힘들어서 무거워도 참고 감나무 아래까지 한 번에 갔다. 빈 자루에 담기는 그래도 쉬웠다. 포대 위로 자루를 덮어 씌어 누인 다음 포대를 슬슬 끌어내면 되었다.


 동생의 포대는 3분의 2가 찼다. 내 것보다는 들기가 수월했다. 앉을 것도 없이 포대 윗부분을 두 손으로 움켜잡아 옮겼다. 중간에 숙일 필요도 없으니 한 번 쉬었다가 감나무 아래로 왔다. 자루에 포대를 뒤집어 넣고 포대를 쑥 들어 올렸다. 딴 고추가 제법 많았다.


  쉬어가기로 했다. 감나무 그늘에 앉으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그런데 목이 너무 말랐다. 동생은 벌써 잘 익은 토마토를 베어 먹고 있었다. 고추밭 맨 앞 한골은 항상 토마토, 오이, 가지, 옥수수  차지였다. 나도 잘 익은 걸로 골라 들고 한입 베어 물었다. 토마토를  든 손 팔뚝을 따라 국물이 줄줄 흘렀다. 시원하진 않아도 메마른 목을 적셔주니 그런대로 괜찮았다.


  잠시 쉰다는 게 폭풍 수다로 이어져 시간이 한참 지난 것 같았다. 아버지가 이제 그만 내려오라고 하면 좋을 텐데. 다시 지옥불로 들어갔다. 쉬다가 하려니 더 힘들었다. 어머니가 우리를 데리러 왔으면 좋겠다. 억지로 한 골을 다 딸 때쯤 그렇게 기다리던 어머니가 오셨다. 어머니가 동생이 따고 있는 골 끝으로 들어가 동생을 먼저 도와주셨다. 그 골의 고추 따기가 금세 끝나자 동생은 토마토 하나를 다시 따들고 감나무 아래로 가서 앉았다.


  어머니가 내 쪽 끝에서부터 또 따기 시작하자 바로 다 끝나버렸다. 두 골씩 네 골을 땄다. 여기까지 하고 어머니가 집에 가자고 하셨다. 가장 듣기 좋은 소리였다. 어머니가 오시고 나서  한 자루가 가득 찼다. 그것을 묶어서 감나무 아래에 두었다. 아버지가 내일 아침에 경운기로 실어 오실 거였다. 집에 가서 쉴 생각을 하니 진골 내려가는 길이 마냥 즐거웠다. 삐릿삐릿 새들이 노래하고, 살랑살랑 산들바람이 얼굴을 시원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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