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라는 말을 쓸 자격에 대하여
트라우마는 흔히 “힘든 일”로 오해된다. 그러나 실제로 트라우마란 돌이킬 수 없는 정신·신경계적 변화다. 정신과 진단 체계인 DSM-5에서도 PTSD는 단순한 공포 반응이 아니라 삶 전체의 구조가 붕괴되는 사건 이후 발생하는 지속적인 손상으로 정의된다. 트라우마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단어를 그렇게 쉽게 쓰지 못한다. 그건 기억이 아니라 기억조차 통제할 수 없는 상태고, 불편함이 아니라 삶의 세계관 자체가 무너지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트라우마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 단어를 사용하는 만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적다. 트라우마는 뇌의 회로를 바꾸고, 편도체와 해마의 연결을 교란하며, 현재에 과거의 공포를 침입시키는 신경생리학적 질환이다. 그건 심리학을 넘어서, 의학적이고 구조적인 ‘변형’이다. 이걸 이해하지 못한 채, “사회 전체가 트라우마 상태다”, “공동체의 상처다”라고 말하는 건 그저 무거운 단어에 기댄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
트라우마는 회복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트라우마 이후의 삶은 회복이 아니라 ‘다른 삶의 구조로 전환되는 것’이다. 의학적으로도 완치는 없다. 단지 반응을 덜 격렬하게 만들고, 의식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조절하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것을 새롭게 의미화하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회복이라는 단어는 희망을 줄 수는 있지만, 정확하지 않다. 다시는 이전 상태로 돌아가지 않기에, 트라우마다.
그렇다면 사회적 트라우마란 과연 어떤 개념인가? 공동체가 겪은 슬픔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은유적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은유가 마치 실체인 것처럼 사용된다는 점이다. 트라우마는 불가역적이다. 그 말이 진짜 의미하는 바가 받아들여진다면, 사회적 트라우마란 곧 국가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이고 회복 불가능한 불신의 고착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사회적 상처’, ‘사회적 분노’, ‘정치적 환멸’이라는 다른 표현을 썼어야 했다. 회복 가능한 트라우마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도 회복을 이야기한다면, 그건 트라우마가 아니라 담론의 도구일 뿐이다.
나는 C-PTSD(복합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를 겪고 있다. 그래서 안다. 트라우마라는 단어는 함부로, 공감적으로, 감정적으로 가져다 쓸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그 단어는 삶 전체가 뒤틀린 사람들만이 말할 수 있는 무게를 지닌다. 정치적 선언을 하려면 정치의 언어로 말하고, 학문적 주장을 하려면 그 분야의 구조를 끝까지 분석한 후에 말해야 한다. 트라우마라는 단어를 빌려와서 학자, 언론인, 활동가가 자기 목적에 맞게 포장하는 순간, 그 말은 고통이 아니라 권력이 된다.
#2025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