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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형 PTSD, 치료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

해외 이론과 치료 모델에서 찾는 자기 실천의 가능성

by 민진성 mola mola

진단 이후 마주한 공허

나는 해리형 PTSD 진단을 받았다. 발작처럼 의식을 잃고, 현실감이 무너지는 순간들이 반복되었다. 의사는 나의 증상이 해리와 연결된다고 설명했지만, 실제로 돌아온 치료는 발작을 줄이는 약물 처방뿐이었다. 해리라는 핵심은 그대로 남아 있었고,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라는 질문 앞에 서야 했다.

이 경험은 단지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다. 진단은 있었지만, 개입은 부재한 상태 — 이것이 해리형 PTSD가 놓인 구조적 현실이다. 그렇다면 제대로 된 치료 체계가 아직 자리 잡지 않은 지금, 나 스스로는 어떤 노력을 할 수 있을까.



왜 안정화가 먼저인가

해리형 PTSD를 다루는 해외 연구자들은 공통적으로 **단계적 치료 모델(phase-oriented treatment)**을 강조한다. Judith Herman(1992)은 『Trauma and Recovery』에서 외상 치료는 안정화(stabilization), 외상 기억 처리(trauma processing), 재통합(integration)의 3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제시했다. ISSTD 가이드라인(2011)은 해리 환자의 경우 노출 기반 치료를 서두르면 증상이 악화되므로, 반드시 안정화와 자기 조절 능력 확보를 선행해야 한다고 권고한다. ESTSS 권고안(2019) 역시 복합 외상·해리형 환자에게는 노출치료보다 안정화 단계의 장기적 훈련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들의 공통된 주장은 명확하다. 해리 상태에서는 뇌의 통합적 정보처리 기능이 흔들려 있기 때문에, 먼저 자기 몸과 현재 시공간에 “붙들어 매는” 안정화가 이루어져야만 다음 단계의 개입이 효과를 낸다는 것이다.



해외 치료 모델의 비교 분석

(1) ISSTD(International Society for the Study of Trauma and Dissociation)

핵심 원칙: “안정화 없이는 외상 처리도 없다.”

강조 요소: 자기 조절(self-regulation), 해리 전조 감지, 다중 자아 상태(multiplicity) 인식.

이론적 배경: 구조적 해리 이론(Structural Dissociation Theory, Van der Hart et al.)에 근거. ‘일상적 자아(ANP)’와 ‘외상 고착 자아(EP)’ 간의 불안정한 전환을 조절하는 것이 1차 목표.

→ 개인적 적용 가능성: 나의 일상에서 ‘해리 전조 신호’를 감지하고, 그것을 즉각 차단하는 기법(grounding, 호흡, 신체 감각 회복)을 훈련하는 것.


(2) ESTSS(European Society for Traumatic Stress Studies)

핵심 원칙: “복합 외상은 단일 사건 PTSD와 다르다.”

강조 요소: 장기간의 안정화, 대인관계 기술 훈련, 사회적 맥락 회복.

이론적 배경: 복합 PTSD(C-PTSD) 개념. 외상 후 증상이 개인 내부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관계·사회적 기능에 깊이 파고든다고 봄.

→ 개인적 적용 가능성: 해리 그 자체만이 아니라, 인간관계·사회적 기능을 유지·회복하는 루틴을 설계하는 것. 예컨대 ‘불안을 느끼더라도 최소한 하루 만보 걷기, 글쓰기, 타인과의 간단한 교류’를 자기 생활의 앵커로 두는 방식.


(3) EMDR International Association 및 Bessel van der Kolk의 관점

핵심 원칙: “몸(body)이 외상을 기억한다.”

강조 요소: 해리 환자는 언어적 기억 접근이 제한되므로, 감각·운동을 활용한 신체 기반 안정화(body-based stabilization)가 필요하다.

이론적 배경: 신체화 이론, Polyvagal Theory(자율신경계 조절).

→ 개인적 적용 가능성: 걷기, 요가, 명상, 체화 훈련을 통해 ‘몸의 현재’를 자각하는 것. 실제로 나는 만보 걷기를 루틴화하며 해리 이후의 공허감을 줄여왔다.


(4) 미국 VA(Department of Veterans Affairs) 및 DoD 가이드라인

핵심 원칙: “증거 기반 치료(evidence-based treatment)의 단계적 적용.”

강조 요소: 노출치료·인지치료·EMDR을 권장하되, 해리 환자에게는 선행 안정화가 필수.

이론적 배경: PTSD는 주로 군인·재난 피해자를 대상으로 연구되었으나, 최근 복합 외상 환자에게 별도 매뉴얼 적용을 시도 중.

→ 개인적 적용 가능성: 나는 노출 자체보다는 ‘인지적 재구조화’를 일상적으로 연습할 수 있다. 즉, “내게 지금 일어나는 감각은 위험이 아니라 해리 증상의 일부”라는 자기 대화를 훈련하는 것이다.



자기 실천의 가능성

안정화 기술 숙련: grounding, 호흡, 신체 접지

트리거 기록과 자기 모니터링: 해리 발생 상황과 전조 관찰

정체감 통합 루틴: 일기, 목소리 녹음, 거울 응시

신체 기반 훈련: 걷기, 요가, 체조

사회적 기능 회복: 대인관계 유지, 지지 그룹 탐색



비판적 성찰과 제언

개인적 차원: 환자는 안정화 훈련을 일상화하고, 치료 공백을 메우는 자기 개입을 시도해야 한다.

학문적 차원: 학계는 해외 지침을 수용하여 해리형 PTSD용 표준 프로토콜을 개발해야 한다.

제도적 차원: 보험·정책을 통해 다단계 모델을 환자에게 실제로 제공해야 한다.

임상적 차원: 해리를 단순한 발작이 아닌 외상 맥락 속 경험으로 이해하는 임상 감수성을 확립해야 한다.



쓰는 행위가 곧 치유다

트라우마는 늘 시간을 단절시킨다. 해리의 순간마다 나의 삶은 끊어지고, 기억은 파편처럼 흩어진다. 내가 브런치에 글을 쓰는 이유는 바로 이 파편들을 다시 하나의 흐름으로 엮어내기 위함이다. 글쓰기는 단순한 표현을 넘어서, 자기 경험을 다시 서사화하는 과정이다. 학자들은 이를 ‘서사적 자기 재구성’이라고 부른다. 내가 흩어진 나의 기억을 다시 내 언어로 불러낼 때, 정체성의 연속성이 조금씩 복원된다.


또한 브런치라는 플랫폼은 나의 목소리를 사회 속에 되돌려 놓는다. 트라우마는 흔히 말을 앗아가고, 침묵을 강요한다. 그러나 공개적으로 글을 발행하는 행위는 침묵을 깨뜨리는 증언이 된다. 독자의 공감과 반응은 내가 겪은 일이 단순한 개인적 고립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에서 목격된 경험임을 확인시킨다. 이는 단순한 ‘글 올리기’가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 행위감과 통제감을 회복시키는 과정이다.


그래서 나에게 브런치는 회복의 장이자, 동시에 미래를 준비하는 실험의 장이다. 나는 여기서 내 목소리를 회복하며, 장기적으로는 정서적 취약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지식과 서사를 구체화하고자 한다. 이 글쓰기의 축적은 단순한 고백을 넘어, 권위와 전문성을 형성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나는 나의 회복을 기록하며 동시에 치유의 언어를 사회에 환원하려 한다. 그것이 내가 글을 쓰는 이유이며, 나의 브런치가 가지는 의미다.




#생각번호2025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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